나의 슬기로운 이중생활
내가 다녔던 작은 기독교 학교에서 선생님과 학생들이 대부분 친절하였다. 이동 수업, 교재와 조별 과제 등으로 항상 미궁 속에 있는 나를 모두가 많이 도와주었다. 그럼에도 여기는 '나의 나라 한국'이 아니었고, 언어가 익숙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수업도, 학교 생활도 하나도 재미있지 않았다. 학년을 반학기 낮춰 왔음에도 불구하고, 따라가야 하는 8학년 (한국의 중학교 3학년 과정) 수업들은 내게 고문이었는데, 수학, 과학 등 어느 정도 숫자가 나오는 수업들은 오히려 나았지만, 문학과 라이팅이 가득한 영어 수업의 단어, 문법, 읽기에서는 그 하나도 제대로 따라갈 수가 없었다.
학교에서 내린 해결책으로, 나는 그 시간이 되면 학교에서 특수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님 반으로 가서 개별 영어 수업을 진행하였다. 아마, 미국 초등학교 수준의 영어 수업이지 않았을까 싶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것은 정말 큰 요소였다. 활발했던 나는 점점 조용해져 갔고, 필요한 때만 소통을 시도하였다. 내가 학교에서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미국 올 때 구매한 손바닥 크기의 전자사전뿐이었다. 반 친구들이 종종 말을 걸어주었지만, 항상 갸우뚱한 표정인 내게, 나중에는 쪽지를 주고받아 의사소통을 시도하였다.
이런 내게 말문이 트이는 날들도 있었는데, 그것은 나의 주말이었다! 그렇게 조용했던 내가 마음껏 한국말로 떠들고, 한국말이 흘러나오는 TV 프로그램을 보고, 한국 음식을 먹는, 이모와 함께하는 이 시간들은 내게 힐링의 시간이었다. 정말이지 누가 봐도 같은 인물이 아닌 이중적인 삶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직장인이 회사 가는 월요일을 두려워하듯, 내게는 학교 가기 전 일요일 밤이 항상 슬픔으로 가득했다.
그렇게 내게 일요일 밤은,
지나간 주말을 뒤로하고
다시금 조용해질 준비를 하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