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대 친구를 만나다

책을 배우다 1 - <체리토마토 파이>를 읽고

by 툰자


정말 예쁜 파이가 세상에 나왔다. 소설 <체리토마토 파이>가 출간되기 전에 우연히 출판사 블로그에서 표지 디자인 설문을 하길래 참여했었다. 다섯 가지 중 딱 내가 선택했던 디자인으로 책이 나오니 기분이 뭐랄까 이 책을 함께 만든 느낌이 들었다. 내 아이가 세상에 나온 마음으로 설레며 따끈따끈한 파이를 만났다.

예쁜 요리를 마주하면 “아우 너무 예뻐서, 아까워서 못 먹겠다.”라고 말하듯이 <체리토마토 파이>가 우리 식탁 위에 도착했을 때 바로 그 마음이었다. 그래서 조금씩 아껴 먹기로 했는데 이게 어찌나 맛있는지 멈출 수가 없었다. 입에 착착 달라붙는 달달한 파이도 아니고, 토핑에 여러 가지 재료를 쓰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결국 앉은 자리에서 파이 한 판을 다 먹어 버렸다.

주인공 잔은 프랑스의 시골 농가에서 혼자 사는 90세 할머니다. 물론 나이만 생각하면 호호 할머니가 맞다. 그런데 잔은 여전히 스스로 운전해서 마트에 가고 친구네도 놀러 다닌다. 십자말풀이와 보드 게임이 취미이고, 산책과 독서도 빼놓지 않는다. 생각은 또 얼마나 젊은지 매사에 쿨하고 긍정적이다.

잔은 친구 부자다. 나이는 제각각 다르지만 함께 보드게임을 즐기며 수다를 떨 수 있는 친구도 여럿 있고, 이웃에 사는 마르셀과 페르낭 부부와는 가족처럼 서로 돕고 지낸다. 잔의 꽃밭을 돌봐주었던 잘생긴 정원사가 일을 그만 두자 속상해하던 잔의 모습은 너무 귀엽다. 혼자 사는 사람에게는 가끔 찾아오는 정원사나 우체부도 반가운 친구더라.

나이가 들수록 친구가 많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꾸 떠나는 친구들이 생기니까. 꼭 사람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잔은 꽃과 나무를 좋아한다. 그런데 동물과 함께 사는 것은 싫어한다. 가끔 놀러 오는 딸이 데려오는 개도 귀찮고, 지하실의 쥐도 끔찍하지만 쥐를 없애기 위해 무서운 고양이를 키울 수 없다고 해서 웃음이 났다.

이사 온 이웃 남자가 방문한다고 했을 때, 잔은 푹 꺼진 머리를 살리려고 미용실도 다녀오고, 분홍빛 도는 향기 로운 분을 뺨에 살짝 바르기도 한다. 나도 잔과 함께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는데 아쉽게도 새로 이사 온 이웃 남자는 무척 지루하다. 돌아가는 이웃 남자에게 '또 놀러 오세요'라는 말이 정말 하기 싫었다는 잔 때문에 나는 빵 터졌다.

“지금도 예쁜 할머니 소리를 종종 듣고, 영감들이 살살 장난을 걸어오기도 한다. 내가 그들의 생기 없는 눈동자에 잠시 빛이 돌아오게 하면 스무 살 때처럼 기분이 좋다. 명줄이 얼마 안 남았어도 누군가의 마음에 든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얼굴 붉어지는 나이가 따로 있지는 않더라.”

이렇게 솔직하고 자신감 넘치는 할머니라니 나도 요렇게 나이 들고 싶다는 생각이 마구마구 들었다.

잔의 이야기 여기저기에서 체리토마토가 상큼하게 터지듯이 웃음이 터진다. 몸과 마음이 이렇게 건강하고 유쾌한 할머니는 처음 봤다. 이웃에 산다면 당장 친구 하고 싶다. 함께 와인을 마시며 책 이야기도 하고, 산책하면서 인생 이야기도 듣고 싶다.

90세의 봄부터 91세의 봄이 될 때까지 딱 1년 간 잔의 일기 형식으로 쓴 소설을 읽고 참 행복했다. 더 나이 들기 전에 잔을 만나서 다행이다. 나이 든다는 걸 두려워하지 말고 할 수 있는 것을 하면서 주어진 시간을 즐기면 된다고 보여주었으니까.

유월 어느 날의 일기에서 잔은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나는 왜 생의 기나긴 끝자락에서 하나도 특별하지 않은 생활을 글로 적어두는가? 마지막으로 눈을 감은 후에도 완전히 사라지고 싶지 않은 욕구 때문인가? (중략) 정말로 일기를 썼어야 했던 나이에는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비밀과 쓸 이야기가 넘쳐났던 시절에는 그 시간의 소중함을 잘 모른다. 그런 젊은 날이, 그런 화려한 시간이 끝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이웃과 친구들이 세상을 떠날 때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느끼는 잔은 특별할 것 없는 소소한 일상이지만 선물 같은 하루하루가 소중할 수밖에.

잔의 일기를 읽으면서 이미 내 곁을 떠난 할머니와 아버지 생각이 났다.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았을 텐데 왜 그냥 가셨는지, 묻고 싶은 이야기가 자꾸자꾸 떠올랐다. 6.25 전쟁으로 돌아가신, 사진 한 장 남아있지 않은 우리 할아버지 얘기는 누구에게 물어야 할까?

아직 내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열심히 묻고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대전에 사는 고모를 만나러 갔다. 할아버지 얘기를 물으니 고모도 너무 어려서 기억나는 게 없다고 했다. 하지만 고모는 물어봐 줘서 고맙다며 눈물을 보였다. 나는 카페에서 세 시간 동안 들은 아버지와 고모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안고 돌아왔다.

이제부터 특별할 것 없는 매일매일이라도 내 이야기를 써야겠다. 훗날 내가 떠난 뒤에 혹시라도 나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특별히 남겨줄 게 없는 우리 아이들에게 내 이야기가 의미 있는 유산이 된다면 더 바랄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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