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숭아꽃 필 무렵

자연을 배우다 3 - 수술을 하기 전에

by 툰자

봉숭아꽃 필 무렵이면 생각나는 시가 있다. 이정록 시인의 ‘꽃물 고치’다.

아파트 일층으로 이사 와서

생애 처음으로 화단 하나 만들었는데

간밤에 봉숭아 이파리와 꽃을 죄다 훑어갔다

이건 벌레나 새가 뜯어먹은 게 아니다

인간이다 분명 꽃피고 물오르기 기다린 노처녀다

봉숭아 꼬투리처럼 눈꺼풀 치켜뜨고

지나는 여자들의 손끝을 훔쳐보는데

할머니 한 분 반갑게 인사한다

총각 덕분에 삼십 년 만에 꽃물 들였네

두 손을 활짝 흔들어 보인다

중략




봉숭아 꽃물 들인 팔순의 소녀에게 반했다. 나 역시 아파트 일층에 살고 있어서 봉숭아꽃 화단을 만들어 볼까 하는 생각도 품었다. 지나가는 소녀들이 꽃을 훑어가기를 기다리고 싶었다.

봉숭아꽃이 벌써 피었을 텐데 요즘은 보기 어렵다. 꽃이 흔하지 않아서 그런지 꽃물 들인 사람도 본 지 오래다. 나는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지만 소박한 꽃물 대신 화려하고 세련된 네일 아트를 하는 사람이 많다.

“첫눈 올 때까지 봉숭아 꽃물이 남아있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대.”

언니의 말을 듣고 아직 생기지도 않은 첫사랑을 위해 꽃물이 오래오래 남아있기를 바랐다.

“봉숭아 꽃물 들이면 수술할 수 없다는데...”


어린 시절 친구의 말을 듣고는 걱정을 많이 했다. 갑자기 아파서 수술을 해야 하면 어쩌나 제발 그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지 않기를 기도했다.

왼손 네 번째 손가락 손톱이 꽃물 들인 것처럼 붉다. 손톱 아래 조그만 종양이 10년 넘게 자라서 어느새 새끼 손톱만 하단다. 10년이 지나서야 내 몸에 붙어 산 녀석의 이름을 알고 깜짝 놀랐다. 그래도 아주 나쁜 녀석은 아니라니 다행이다.

정체를 알고 나서도 나는 녀석과 헤어지기를 미루고 미루었다. 헤어지기 싫어서는 당연히 아니다. 녀석을 떼어버린 후 2주 정도는 엄청 아프고, 한 달 정도는 지나야 상처가 아물 거라는 의사의 말이 미적거리는 이유였다.

녀석이 커지는 만큼 손톱은 더 갈라지고, 점점 더 붉어졌다. 전에는 부딪히거나 찬물에 손을 넣을 때만 아팠는데, 녀석의 정체를 알아버려서 그런지 수시로 찌릿찌릿한 통증을 느꼈다. 남편에게 엄살 좀 부렸더니 당장 수술 날짜를 잡으라고 난리였다.


어릴 때 엄마가 심부름 다녀오라고 하면 숙제가 하고 싶었다. 고등학교 시절엔 시험 기간이 가까워질수록 소설이 읽고 싶었는데 수술 날짜를 잡고 나니 손톱에 꽃물을 들이고 싶다.

옛날 우리 집 마당에는 봉숭아꽃이 있었다. 세 자매가 나란히 앉아 꽃잎을 따다가 돌로 찧어 손톱에 올렸다. 엄마는 헝겊과 무명실로 잘 때 빠지지 않게 꼭꼭 동여매 주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누가 더 곱게 들었나 자랑하고 약 올리고 그랬다.


‘봉숭아꽃만큼 사람과 가까운 꽃이 있을까?’

꽃은 대부분 한 발짝 떨어져서 눈으로 즐기고, 향기를 뿜어내는 꽃이라야 한 발짝 다가가서 냄새 맡을 뿐이다. 온통 상처 난 몸으로 나를 위해서 하룻밤 내 몸과 한 몸이 된 꽃은 봉숭아뿐이다. 제 몸의 체액을 다 뽑아 손톱으로 스며드는 동안 빛깔을 잃는다. 자식을 키우는 어머니 같은 꽃이다.

무명실로 동여맨 열 손가락이 불편해서인지 봉숭아꽃의 아픔 때문인지 손톱으로 봉숭아 꽃물이 스며드는 밤에는 나도 잠을 설쳤다.

손톱 밑의 가시처럼 아픈 그 녀석과 곧 헤어진다. 10년을 함께 살았는데, 보내고 한 달 정도 아픈 것은 당연하게 받아들이자. 제 몸을 다 내어 주는 봉숭아꽃도 있는데 손톱 하나 아프다고 징징거릴 수는 없다.

갈라진 손톱이 떨어지고 새로 손톱이 돋아나면 더 이상 붉지 않으려나. 그때가 되면 봉숭아꽃을 훑어다가 열 손가락 손톱마다 꽃물을 들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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