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을 지키는 키다리 소년

자연을 배우다 1 - 느티나무 100그루를 심었다

by 툰자

늦둥이가 뱃속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던 2008년 봄,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무를 심고 싶었다. 노산이라 아기를 걱정하는 마음이 컸던가 보다. 아기가 나무처럼 건강하게 쑥쑥 자라기를 바랐다. 식목일을 앞두고 남편과 함께 농원으로 나무를 구하러 갔다. 나는 여자 아이를 상상하며 사과나무나 꽃나무 몇 그루를 심어야겠다 생각했는데 남편은 느티나무를 심자고 했다. 과실수는 손이 많이 간다고.

주로 도매를 하는 농원에서는 묘목 100주를 한 묶음으로 팔았다. 얼떨결에 우리는 느티나무 100주를 십만 원에 사서 시골집으로 갔다. 어머니에게 과수원 둘레에 나무를 심겠다고 하자 복숭아나무도 지긋지긋한데 무슨 나무를 또 심느냐고 싫어했다. 말씀은 그렇게 하고 임신한 나를 대신해 남편과 나무를 심은 사람은 어머니였다.

내 손가락 굵기에 키가 1m 정도였던 느티나무는 아이가 태어나 아장아장 걷기 시작했을 때 내 키를 훌쩍 넘었다. 기름진 땅의 느티나무는 아이가 자라는 속도보다 열 배는 빨리 자랐다. 우리는 느티나무 옆에서 고구마와 감자를 캐고, 단감과 복숭아를 땄다.

‘나무 아래 넓은 그늘이 생기면 평상을 놓고 시원한 수박도 쪼개 먹고, 옥수수도 쪄먹어야지.’

‘아이들이 자라면 높은 느티나무에 올라가기도 하겠지?’

어릴 때 나는 겁이 참 많았는데 신기하게 나무를 잘 탔다. 우리 형제 중에도, 동네 조무래기들 중에도 나무에 오르는 아이가 없었는데 말이다. 집 앞의 고등학교 운동장에는 키다리 플라타너스가 많았다. 나무를 끌어안고 조금씩 발을 움직여 올라가는 것은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나무옹이가 발바닥에 닿으면 커다란 나무가 나를 들어 올리는 것 같았다.

40여 년 전, 우리 동네에서 높은 건물은 겨우 2층 양옥이었다. 어린 나는 나무 꼭대기가 동네에서 제일 높은 곳이라고 생각했다. 나무 아래서 나를 올려다보는 동생들과 동네 꼬마들을 보며 꽤나 우쭐했다.

‘니들은 이렇게 못하지? 내가 이 세상의 왕이다 으하하하.’

내 놀이터였던 운동장에는 미루나무도 참 많았는데 여름이면 미루나무 주변이 온통 송충이 천국이 된다. 털이 많은 송충이가 사방에서 꾸물꾸물 기어가는 모습이 너무 끔찍해서 미루나무를 다 베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훗날 학교 기숙사를 짓는다고 그 많은 미루나무를 다 없앴다. 미루나무와 함께 송충이는 사라졌지만 그렇게 서운할 수가 없더라. 내가 나무에 오르지 않는 나이가 되었지만 나무들이 더 이상 사라지지 않기를 바랐다.

어릴 적, 이웃이 밭에 복숭아나무가 있다고 따다 먹으라고 해서 간 적이 있다. 복숭아가 주렁주렁 열린 과수원에 들어갔다가 나는 복숭아털 때문에 두드러기가 나서 먹지도 못했고, 그 기억 때문에 줄곧 복숭아를 피했다.

결혼하고 시댁에 갔더니 집 둘레가 전부 복숭아나무였다. 봄에는 복숭아 열매솎기도 하고, 해충을 막기 위해 종이옷도 입혀주었다. 여름에는 잘 익은 복숭아를 아기 다루듯 조심조심 따서 포장도 했다. 복숭아나무랑 지내다 보니 털 알레르기는 감쪽같이 사라지더라. 심지어 첫째를 임신했을 때는 복숭아만 엄청 먹었다.




“인자 복숭아나무도 늙고, 우리도 늙어서 더는 농사 못 짓겄다.”

5년 전, 아버지는 과수원을 팔고 우리가 사는 군산이나 형님네가 있는 천안으로 가고 싶다고 했다. 도시에서 편하게 한 번 살아보고 싶다고. 남편은 격하게 반대했다. 평생 흙을 밟고 나무랑 살아온 분들이 도시 생활에 적응하기 어렵다고 했다. 복숭아 농사는 그만두더라도 시골에서 텃밭이라도 가꾸며 사시는 게 낫다고 설득했다. 남편의 반대에 서운하셨던 부모님은 결국 천안으로 가셨다.

나는 늦둥이와 함께 커가는 느티나무를 볼 수 없기 때문에 속이 상했다. 남편은 자신이 아기였을 때부터 함께 자라온 복숭아나무가 사라지니 섭섭하구나 생각했다. 먹여 주고, 입혀 주고, 대학 공부까지 시켜준 복숭아나무가 사라지는 게 싫은 거라고. 그런데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이제 난 고향이 없는 거야. 부모님 없는 고향은 더 이상 고향이 아니지.”

부모님이 천안으로 이사하고 몇 해 동안 고향에 가지 못했다. 남편은 명절에만 만나던 고향 친구들 모임에도 참석할 수 없었다. 지난해 추석 친정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고속도로 대신 대둔산 쪽으로 국도를 탔다. 완주를 지나는데 고향 생각이 났는지 남편이 잠깐 들러 보자고 했다. 어떻게 변했을까 내심 궁금하던 차여서 흔쾌히 동의했다.

아버지가 친척들과 함께 지었다는 고향집과 오 형제를 키우고 시집 장가 보내줬던 과수원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 자리에 자동차 정비 공장이 우뚝 서 있었다. 정말 다행인 건 삭막한 공장 둘레에 틀림없이 우리가 심었던 그 느티나무들이 당당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거다.

“현우야, 이 나무 이름이 뭐 게?”

“뭔데?”

“현우 나무야. 네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 할머니랑 아빠가 심은 거야. 나무처럼 튼튼하게 자라라고.”

“진짜? 내 나무야?”


아이는 해바라기처럼 얼굴이 환해졌다. 느티나무의 키를 가늠해보고 자신과 나이가 같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 눈치다. 벌써 느티나무는 10m가 넘는 키다리가 되어 있었다. 남편에게는 복숭아나무가 키다리 아저씨였고, 나에게는 플라타너스가 있었다. 아들에게는 동갑내기 키다리 소년이 있다. 부모님 떠난 고향을 지키는 키다리 소년을 만나러 가끔 고향에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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