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걷는 시간, 함께 뛰는 시간

친구를 배우다 4 - 암과 앎

by 툰자


가까운 사람들의 암을 보고서야 알았다. 자신의 몸을 잘 알지 못한다는 걸. 무서운 세포가 몸 안에서 자라는 줄도 모르고 사는 경우가 흔하다. 대부분 한참 진행된 뒤에야 발견한다. 언니는 대장암 3기가 되도록 별다른 증상도, 통증도 없었다고 했다. 언니는 매일 운동도 한 시간씩 하고, 일 년에 맥주 한두 잔 외에는 술도 안 했고, 외식보다는 집밥을 먹고 살았다.

중학교 친구, 아경이도 마찬가지다. 바른생활은 기본이고, 대학 병원 가정의학과에 꾸준히 다니면서 건강 체크를 했다. 의사가 가슴 초음파 한 지 좀 됐으니 정기 검진 한 번 받으라고 했단다. 검진 결과 특이한 조직이 있다고 해서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는데 떼어낸 조직을 검사해 보니 유방암이라고. 친구 역시 그때까지 어떤 증상도, 통증도 느끼지 못했다고 했다.

예고 없이 찾아오는 암을 막을 도리는 없다. 암의 정체를 알고 나서도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수술을 받고, 조직 검사 결과를 가슴 졸이며 기다리고, 항암 치료를 견딜 뿐이다. 독한 약을 버텨내려면 몸이 약해지지 않도록 잘 먹고 운동해야 하지만 언니는 수술 전처럼 쉽지는 않다고 했다.

중학교 3학년 아경이는 온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사는 아이처럼 늘 밝았다. 고등학교는 달라서 한동안 만나지 못했다. 그런데 스물 한두 살 때쯤, 아버지 제사를 혼자 준비해야 한다고 해서 놀란 적이 있다. 아버지가 오토바이 사고로 돌아가시고, 엄마가 가장이 되자 아경이는 아르바이트와 집안일을 하고 있었다. 친구지만 그때까지 나는 아경이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대학교에 다니던 나와 숙이가 아르바이트하는 레코드 가게로 찾아가면 아경이는 큰언니처럼 과일도 깎아주고, 짜장면도 시켜주고 그랬다. 얼굴도 예쁘지만 마음 씀씀이는 더 예뻤다. 힘든 티를 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아경이 엄마가 식당에서 일하다 쓰러졌다. 40대 후반의 젊은 엄마는 대학 병원 중환자실에서 의식이 없는 채로 오랫동안 누워있었다. 오빠는 직장을 그만두고 병원에서 엄마 곁을 지켰다. 아경이는 가장이 되어 일을 하고, 살림도 하고, 동생과 오빠를 챙겼다. '무섭고, 외로운 그 시간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그래도 우리가 병원에 찾아가면 고맙다며 웃는 얼굴을 보여줬다.

엄마는 기적처럼 깨어났다. 물론 예전의 씩씩하고 명랑했던 엄마가 아니라 어리고 약한 엄마로 돌아왔다. 재활치료로 엄마가 걸을 수 있기까지 아경이는 또 얼마나 애를 썼는지 그때는 몰랐다. 도움을 주는 방법도, 어떻게 위로해야 하는 지도. 연락이라도 자주 할 걸 그것도 못한 게 참 미안하다.

결혼한 아경이는 아이 둘을 낳아 키우며, 예닐곱 살 아이 같은 엄마를 돌봤다. 집에 놀러 가면 엄마에게 우리 이름을 하나하나 알려주고 엄마는 조금 어눌하게 따라 하곤 했다. 엄마는 시간이 지날수록 말과 행동이 조금씩 나아졌고, 예전처럼 씩씩한 모습을 되찾았다. 그러나 잠자리에서 실수를 자주 했고, 별 거 아닌 말에도 아이처럼 토라져서 달래야만 했다. 남편이 곁에서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아경이 혼자 감당하기 벅찬 일이었다. 남편은 사위가 아니라 아들처럼 했다.

“툰자야, 우리 아들 꿈이 뭔지 알아?”

“대통령?”

“아니, 할머니. 학교도 안 가고 매일 집에서 텔레비전 보면서 엄마랑 논다고. 하하하”

기적처럼 깨어난 엄마는 ‘할머니’가 꿈이라던 아경이 아이처럼 순수한 모습으로 20년쯤 살았다. 그리고 몇 년 전에 돌아가셨다. 친구에게는 크나큰 상실이겠지만 엄마도 많이 아팠으니 그만 천국으로 가셔도 괜찮다고 나는 생각했다.


아경이는 두 아이의 엄마로, 아기 같은 엄마를 돌보는 엄마로, 오빠와 남동생의 엄마 노릇까지 해 왔다. 나는 친구가 이제 좀 쉬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롯이 자신을 위하는 이기적인 사람이 되길 바랐다. 하지만 아경이는 오빠와 함께 김밥집을 열었고, 서빙에 배달까지 더 치열하게 살았다.

지난해 7월, 대둔산 아래 펜션에서 아경이랑 숙이네 가족과 함께 모였다. 중3 때 짝꿍으로 만나 33년 우정을 지켜온 우리를 축하하기 위해 아이스크림 케이크와 초를 준비해 갔다. 그런데 아경이가 피곤하다며 방에 들어가 누웠다. 평소와 달라 좀 이상했는데 숙이가 내게 다가와 울먹였다.

“아경이 유방암이래.”

나는 화가 났다. 너무 열심히 살았던 아경이에게, 새벽 기도에 주일 봉사까지 해 온 아경이를 지켜주지 않은 하느님에게. 우리는 케이크 위에 초를 켤 수 없었다. 하지만 잠깐 누웠다 일어난 아경이는 웃으며 게임을 하자고 했다. 우리는 애들처럼 깔깔대며 ‘쿵쿵따’와 ‘369’ 게임을 했다. 암 따위는 잊으려고 애썼다.

작년 10월, 아경이는 서울에서 암 수술과 가슴 복원 수술을 받았다. 아경이를 만나러 병원에 갔는데 복도에서, 엘리베이터에서 두건을 쓴 사람들을 마주할 때마다 가슴이 철렁철렁 내려앉았다. 아경이는 수술 직후라 걸음도 잘 걷지 못하고, 앉아 있는 것도 힘들어했다. 곁에서 도와주는 남편에게 아프다고 짜증 내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친구의 투정이 반가웠다. 더 이상 고통을 참지 말고 자신을 돌봐야만 다시 건강해질 수 있으니까.

아경이가 카톡으로 쌍무지개 사진을 보냈다. 서울 병원에서 내려오는 길에 보았다고 했다. 내가 발견한 행운처럼 좋았다. 얼마 뒤 조직 검사 결과가 나왔다. 정말 드문 경우라고 했다. 항암 치료가 필요 없을 정도로 초기라서 집에서 건강관리 잘하고 정기 검진만 받으면 된다고 했다. 나는 하늘에 대고 욕했던 것을 반성하고 아경이의 주님에게 ‘고맙습니다’를 반복해서 외쳤다.

전화할 때마다 아경이는 걷고 있었다. 하루에 만보를 걷는다고 했다. 바람도, 햇살도 좋은 날에는 시가 절로 나온다고 했다. 그러다 가끔은 엄마 생각이 나서 걷다가 주저앉아 미친 듯이 울 때도 있다고. 하지만 혼자 걷는 시간이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하는, 자신을 사랑하는 시간 같아서 행복하다고 했다. 아경이가 생각나는 날에는 나도 걸었다.

벚꽃이 팝콘처럼 터져 환한 봄에 아경이랑 숙이를 군산으로 초대했다. 2019. 새만금 국제 마라톤 대회에서 우리는 ‘짝꿍’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현재의 짝꿍들과 함께 5km를 뛰었다. 벚꽃만큼 웃음꽃도 활짝 폈다. 마라톤을 마친 사람들에게 무료로 나눠 주는 군산의 보리 비빔밥과 막걸리를 먹으며 내년에는 10km를 달려보자는 거창한 계획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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