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전성기는 언제예요?"
느닷없이 창밖만 바라보는 엄마에게 남편이 물었다. 대화가 끊어진 조용한 시간이 어색했나. 고향집에서 하루를 보내고, 다음 날 강천산 다녀온 뒤 우리 집에서 하루를 보냈다. 오랜만에 온 자식이나 부모님은 손님이다. 엄마가 사위랑 딸 밥해준다고 신경 쓰는 것처럼 엄마 흉내 낸다고 장보고 음식 했더니 피곤했다. 버스 타고 간다고 해서 터미널에 모셔다 드려야지 했는데.. 운전을 싫어하는 남편이 무슨 바람이 불었나 고향까지 모시겠다고 했다. 나는 미적거리고 엄마는 손사래 치며 말렸는데 자동차는 출발했다.
사흘을 함께 했으니 대화할 거리도 떨어지고, 하품과 졸음이 몰려왔다. 그때 날아온 질문이 눈을 번쩍 뜨게 했다.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엄마의 전성기.
"아휴, 그런 게 어딨어?"
그렇게 끝나는가 했는데 시작이었다.
"우리 때는 그냥 'X오빠, X동생'이 있었지."
"우하하 엄마, 그게 뭐야? 나 첨 들어."
"맘에 드는 사람을 그렇게 불렀어. 별 거 아녀."
"엄마도 X오빠 있었어?"
엄마는 X동생. 스무살의 성자씨를 좋아한 첫 번째, 두 번째 X오빠 이야기에 우리는 빵빵 터졌고 엄마는 신이 났다. 수학을 멀리한 내가 미워했던 미지수 X가 설레는 로맨스 문자로 쓰였다니 신선했다. 성자 씨의 세 번째 X오빠가 이야기의 절정. 그 오빠는 라디오에 고백하는 사연을 보냈다고 한다. 라디오도 귀하던 시절이라 동네 이장님 댁에서 스피커로 라디오를 들려줬는데. 그래서 온 동네에 소문이 났단다. 하지만 그 오빠는 고백 후 바로 입대했고 그곳에서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새드 엔딩. 따로 데이트 한 번, 손 한 번 잡아본 적도 없다는 엄마의 3X오빠. 서로 알지 못하고 끝나버린 이야기. 그래서 미지의 오빠, 동생 X인가 보다.
엄마의 이야기는 대둔산 휴게소에 이르러 끝났다. 모처럼 신나게 얘기하느라 목이 잠긴 엄마와 뜻밖의 질문으로 엄마에게 생기를 불어넣은 남편에게 시원한 식혜를 사다 줬다. 전성기처럼 행복한 시간은 짧다. 엄마는 또 수많은 긴긴밤을 홀로 견디겠지만 함께 있는 시간에는 그녀에게 묻고 긴긴 이야기를 들어줘야지.
동화 《긴긴밤》의 주인공, 코뿔소 노든이 생각났다. 아내와 딸, 유일한 친구까지 잃은 노든이 어두운 시간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우연히 만난 새로운 친구들이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었기 때문이다.
최근에 갱년기 증상인지 오랫동안 컨디션이 엉망이었다. 코로나인가 싶어 병원 검사도 받았지만 음성이어서 팔다리에 힘이 없고 두통까지 심한데 독서 모임에 나갔다. 횡설수설하다가 집중할 수가 없어 사정을 말하고 먼저 나왔다.
독서 모임 다음 날, 먹을 것도 없는데 커피까지 똑 떨어졌다. 아들과 먹으려고 계란 다섯 개를 삶고 있는데 문자가 왔다.
"현관문 앞에 아침 식사 배달했어요."
독서 모임 회원이 이른 아침 동네 카페에서 따뜻한 커피 두 잔과 봉지 가득 구수한 빵을 사다 놓았다. 가슴은 뭉클, 눈물이 핑.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마음을 써 주는 사람이 있어 행복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것은 관심이 있다는 것. 묻는다는 것은 상대를 생각하고 있다는 의미. 살다 보면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털어놓는 얘기들도 있다. 시장에서 마늘 사다가 쪼그리고 앉아 할머니 아들 얘기를 들어준 것처럼. 좋아하는 사람에게 주지 못한 고백 편지를 라디오에 보내는 것처럼. 나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무심코 마음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2008년 10월, 딱 이맘때 대학 병원의 신생아 집중 치료실에 태어난 지 일주일도 안 된 아기만 두고 홀로 나와 택시를 탔다. 행선지를 말하자마자 벌어진 입에서 꺽꺽 울음이 터져 나왔다. 도착할 때까지 아무 소리도 없이 내 아픔을 들어주셨던 기사님. 미안하다는 말도 못 하고 내렸다. 주변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연히 만나는 사람들에게도 귀를 열고 마음을 들어야겠다. 적어도 내가 받은 만큼은.
시댁에 가면 아버지에게 전성기를 물어봐야지. 아버지의 X동생, X누나는 몇 명이나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