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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달리 Oct 19. 2022

이번 생에 운동 왕이 될 자신은 없다 하지만

운동 무신경자의 탄생


 13살의 가을, 나는 교실 창밖의 하늘을 보며 빌었다.


 제발 당장 장대비가 쏟아지게 해주세요. 저 오늘은 정말 체육 하기 싫단 말이에요!


 이런 내 마음과 상관없이 야속한 하늘은 눈치 없이 쨍쨍했고, 운동장에서는 내 또래 아이들이 체육복을 입고 일찌감치 몸을 풀고 있었다. 서로 얼굴을 보며 까르르 웃거나 하품하는 걸 보니 다들 아무 걱정이 없어 보였다. 나도 저들처럼 체육복으로 갈아입은 지는 한참이나 지났지만, 어쩐지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주 격하게 나가고 싶지 않다! 딱 한 시간만 사라지고 싶다! 어느 신이든 나를 달리지 않게 할 수 있다면 오늘부터 독실한 신자가 되리라 다짐했다. 하나 삐딱한 신자에게 기적 같은 일은 없었다. 내가 이렇게나 간절한 이유는 하나였다. <뛰기 싫어서> 그것도 ‘오래’ 뛰기 싫어서. 도저히 1,000미터를, 운동장 5바퀴를, 체력장의 마지막 관문인 오래 달리기를 완주할 자신이 없어서! 나의 불호와 상관없이 시간은 빠르게만 흐른다. 수업 종이 치자 교실 문을 잠가야 하는 주번이 내게 빨리 나오라고 재촉했다. 나는 흡사 도살장에 끌려가는 마음으로 운동장을 향했다.


 안타깝게도 단체 체력장에 포기란 선택지는 없다. 어떻게 아냐면 이미 살며시 체육 선생님을 떠봤기 때문이었다. 잔뜩 울상인 채로 “혹시, 아주아주 혹시요. 완주를  하면 어떡해요?”라고 물었을 , 선생님은 이렇게 답했다. “기어서라도 완주해.” 나는 고개를  숙인  주변을 살폈다. 흙먼지가 날리는 운동장에는 5, 6학년 전교생이 빠짐없이 나와 있었다. 6학년들은 간이로 그어놓은 출발선 라인 부근으로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운동장을 감싸고 있는 4면의 스탠드에서는 이미 한차례 뜀박질을 마친 5학년 학생들이 앉아 쉬는 중이었다. 체육 선생님은 쉬고 있던 아이들을 불러  명씩 6학년과 짝지어줬다. 짝짓는 방식은 이러했다. 5학년 1반의 1번은 6학년 1반의 1번의 바퀴 수를 재고, 1반의 2번은 2번의 바퀴 수를, 3번은 3번의 바퀴 수를, 그리고 16번은 16번의 바퀴 수를, 이렇게 하다 보면 5  아이들에게 모두 짝이 생긴다. 나는  짝을 흘낏 바라봤다. 초면이었다. 아는 사람이면 바퀴 수를  줄여줄  있냐고 부정 청탁이라도 해볼까 했는데. 이제는 정말 꼼짝없이  수밖에 없구나. 그리고는 출발선 앞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는데, 이게 무슨 일이야.  주변에 죄다 자기 반에서  뛴다고 하는 놈들뿐인 거다. 우리  릴레이 선수인 수빈이부터 시작하여 3반에 한결이, 4반의 지수, 아니 5 쟤는 축구부 아니었나? 얘네랑 같이 뛰었다가는  느려 보일  뻔해. 그렇게 의미 없이 견제하다가  건너편에 같은  희수를 발견했다. 희수? 희수도 조금 느리지 않나? 물론 우리 반에서는 내가 압도적인 거북이지만, 희수도 아주 빠르진 않았던  같아. 음흉한 의도를 갖고 그쪽으로 슬금슬금 자리를 옮겼다.


 희수 뒤에서 같이 뛰어야지! 말은 쉽다. 다만 우리 반에서 느린 편에 속하는 희수보다 내가 더 느리니까 행동이 어려울 뿐. 같이 뛰기로 (혼자서) 약속한 사람이 생겼다는 사실만으로도 조금 덜 창피한 기분이 들었다. 꼴찌라도 같이 들어오면 괜찮아. 내가 아무리 느려도 설마 얘들이랑 한 바퀴 이상 차이 나겠어? 그렇게 꼴찌를 면하기 위한 나름의 궁리를 할 때쯤, 시작 총성이 들렸다. 그러자 아이들이 출발선 너머로 쏟아져 나갔다. 나를 제치고 뛰어나가는 이들로 인해 내 시야에서 희수는 사라졌고, 시작과 동시에 계획도 어그러졌다. 그래도 어떻게든 뒤처지지만 말자는 마음으로 악착같이 뛰었다. 50미터를 겨우 넘었을 때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기 시작했다. 아직 한 바퀴도 안 돌았는데 땀이 비 오듯 내렸다. 운동장의 반을 돌았을 때, 그대로 교문 밖을 향해 뛰어나가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렇게 헉헉대며 달리다가 겨우 출발 지점에 도착했을 때, 스탠드 그늘에 있는 내 짝꿍이 앙 쥔 주먹에서 당당히 검지 손가락 ‘하나’를 펴는 걸 보고 겨우 한 바퀴 돌았다는 걸 깨달았다. 망할, 나는 이미 방전인데. 나는 숨을 헐떡이며 2바퀴를 향해 나아갔다. 그러다 어느샌가 다리가 아까보다 무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반신은 이미 내 의지와 상관없이 뛰고 (기고) 있었다. 힘이 풀린 오른발이 내 왼쪽 복숭아뼈를 치면서 달렸다. 다리는 아프고 심장은 가쁘다. 어느 새부터는 나 스스로 몇 바퀴를 달렸는지 세는 걸 포기하기로 했다. 그냥 내 앞의 쟤네들이랑 비슷하게 뛰고 있겠지. 그런데 잠시만, 지금 운동장에 사람이 좀 없는데? 땅만 보고 뛰다가 고개를 들고 주변을 보니 웬걸 사람이 없다. 생각해보니 축구부였던 남자애도 우리 반 릴레이 선수 수빈이도, 모두 한참 전에 나를 지나친 적이 있었는데 다들 벌써 5바퀴를 다 뛰었나 보다. 나는 흐리멍덩한 정신을 다잡고 아는 얼굴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자 반 바퀴쯤 앞에 희수가 보였다. 뒤를 돌아보니 내 뒤로도 몇 명이 있다.


 나, 아주 꼴찌는 아니야!


 트랙 위 5명은 죄다 지쳐 보였다. 그 상태로 반 바퀴쯤 더 돌았을 때, 희수가 마지막 5바퀴를 뛰고 행로를 이탈하는 모습이 보였다. 나도 그럼 이게 마지막 바퀴인가 봐! 몇 바퀴를 뛰었는지 세기를 포기했던 나는, 갑자기 의문의 자신감이 솟았다. 내 뒤에 애들이 있으니까 꼴찌만 하지 말자! 눈을 꽉 감고 이를 악물고 젖 먹던 힘을 다해 달렸다. 속으로 생각했다. 나 그래도 몇 주간 오래 달리기 수업을 하면서 늘었나 봐! (번번이 꼴찌 했지만) 땀으로 범벅된 시야 사이로 출발선이자 결승선이 보이기 시작했다. 괜히 뭉클해져 두 팔을 쫙 펴고 당당하게 들어와 스탠드의 그늘로 향했다. 그러자 갑자기 선생님이 외쳤다.


 야, 너 한 바퀴 더 남았대!


네? 한 바퀴 더요? 내가 어안이 벙벙해 잠시 멈춰있자, 선생님은 빨리 마저 뛰라는 제스처를 보냈다. 나의 짝꿍은 엄지만 빼고 네 손가락을 편 채로 매우 언짢아 보였다. 나는 스탠드로 향하던 걸음을 멈추고 뒷걸음질 쳤다. 다시 트랙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눈앞이 캄캄해졌다.



 ‘다른 애들은 마지막 바퀴랬는데! 이 넓은 운동장에서 나 빼고 모두가 쉬는데, 나만 이게 뭐야.’


 헉헉대며 운동장을 다시 돌기 시작했을 때, 문득 주변을 돌아봤다. 아무도 없는 거다. 정말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때부터 괜스레 서러워져 눈물이 났다. 이거 봐. 나 못 뛴다니까. 오래 잘 달릴 수 있는 사람만 오래 달리기를 하자고요. 거북이한테 이런 걸 시키면 어떡해요. 이거 하나 남들처럼 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화가 나서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해지고 눈물은 그렁그렁 차오르는데, 약 이백 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 앞에서는 절대로 울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입술을 삼키듯이 물고 뛰었다. 그렇게 운동장을 반 이상 돌았을 때 쉬는 시간 시작종이 들렸다. 그때부터는 걸었다. 그것도 웃으면서. 상황이 이렇게 되니 ‘저런, 안됐네’라는 눈빛보단 차라리 ‘저런, 해탈했나 봐’라는 눈빛을 받는 게 나을 거 같았다. 셰익스피어가 그랬다. 힘들 때 우는 건 삼류고, 참는 건 이류지만, 웃는 건 일류라고. 아니다. 일류는 이미 진작에 다 뛰고 그늘에서 쉬고 있다. 힘들 때 웃는 놈은 쿨한 척하는 거야. 사실은 비참한데 웃으면 좀 괜찮아 보이거든. 마치 오래 달리기 기록 따위 나와는 상관없어 보이는 사람 같잖아. 전교 꼴찌여도 하나도 안 쪽팔려 보이잖아. 그리고 그날 나는 확실히 깨달았다. 난 운동 진짜 못해! 앞으로 할 수 있으면 남들 앞에서 운동하는 건 무조건 피하자! 그래, 평생 운동 안 해!


 하지만 지금 나이 서른, 이제는 더 이상 피할 구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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