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멍청한 여자는 철이 누구의 아들인지도 알지 못하고 허둥지둥 달아나기 바빴다. 그래, 현주에게서는 한 번도 예술의 냄새가 나지 않았다. 그저 예술가라는 남자를 쫒아 다니기 바빴을 뿐이다. 혁은 잠든 철을 내려다보았다. 녀석의 몸 속에 흐르는 피를 생각하자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아이를 학대할 생각은 없었다. 그 정도로는 어림없다. 이 아이 속에 흐르는 피는 내 것이 아니다.
혁은 며칠을 두고 생각했다. 예술가를 사랑했던 현주. 예술가의 피가 흐르는 아이. 혁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보다 완벽하고 끔찍한 복수가 무엇일까. 꺄르륵, 자신을 보며 웃는 갓난아이를 무서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복수는 하나였다. 현주가 그토록 싫어하던 자신. 그렇게도 혐오하던 기름때와 쇳가루. 그래, 그들에게 엿 먹이는 길은 고귀한 예술가의 피를 기름때로 뒤덮는 것뿐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이 끝없는 분노가 잠재워질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은밀하고 예술적인 음모이자 가장 우아한 복수가 될 것이었다.
처음부터 혁은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아이의 존재를 의심했지만 현주를 잃고 싶지 않아 침묵했다. 그런데 현주는 자기가 그토록 원하던 남자의 아이인줄도 모르고 이 완벽한 예술품을 버리고 떠나려고 용을 쓰다가 정말로 사라져 버렸다. 혁은 잠든 철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다가 방을 나왔다. 문을 닫고 소주를 꺼내 주방 앞에 앉았다.
그런 일들로 아이에게 오래도록 미안한 감정을 갖고 살아왔지만 어느 순간 의구심이 들었다. 복수를 하기 위해 철을 키운 것인지, 현주의 흔적이라도 지니기 위해 철을 키운 것인지, 아니면 이 아이를 진짜 자신의 아이로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헛갈리기 시작했다. 분명 복수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상하게도 아이가 자랄수록 무언가 다른 감정들이 비집고 들어왔다. 혁은 그 불안하고 불편한 마음들을 마주할 때마다 풀을 뽑듯 깨끗이 뽑아냈지만 그것은 자꾸 다시 자라났다. 뽑고 또 뽑아도 잡초처럼 스물스물 기어올랐다.
어느 순간 무성한 숲을 이루자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었던 혁은 그곳을 아예 모른 척하기로 했다. 자신의 세계에 존재하는 곳이 아닌 곳으로 치부해 버렸다. 그곳은 사람이 살 수 없는 곳. 그곳은 아무것도 아닌 곳. 아무도 가본 적이 없고 가고 싶지도 않아하는 그런 버려진 섬이라고. 그러니까 이것은 다른 종류의 분노였다. 일테면 자신이 무인도로 두었던 그곳에서부터 기인된 전혀 다른 감정의 일종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