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마탄자

by 민달이

* 블로(기공): 용접에 공기가 들어가 구멍이 뚫리는 것--



혁은 방문을 벌컥 열고 철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일어나! 필기시험부터 봐야 할 거 아니냐.

철이 이불을 머리 위로 뒤집어쓰며 알았다고 짜증을 내자 혁이 한숨을 쉬었다.

-나와서 일을 돕던가. 지금이 몇 시냐!


꼼짝도 하지 않던 철이 발버둥을 치며 일어나더니 혁을 밖으로 밀어내고 문을 닫았다. 잠이 덜 깬 얼굴로 멀뚱이 앉아 있는 철의 귀에 잔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머리를 벅벅 긁던 철은 일어나 ‘용접’이라고 쓰여 있는 아무 책이나 집어 들었다. 밖으로 나와 이것 보라는 듯 책을 흔들자 잔소리가 줄어들었다. 혁이 철공소 쪽문으로 들어섰다. 세 걸음쯤 되는 작은 마당을 지나 철공소 안으로 들어서는 아빠를 보며 철은 꿀꺽꿀꺽 물을 마셨다. 대충 밥을 먹고 일어서자 가게 안에서 불꽃이 튀는 게 보였다. 시계를 보니 오후 1시였다. 태양이 손바닥만 한 마당 안으로 쏟아져 내렸다. 그 강렬한 태양의 건너편에 어둡고 서늘한 아빠의 가게가 초라하게 보였다.


철은 방에 들어가 만화책을 집어 들고 벌렁 바닥에 누웠다. 라디오에선 톤을 과하게 높인 DJ가 안치환이라는 가수를 소개하고 있었다. 여름에 듣는 귀뚜라미 소리는 어떤 가 궁금한데요. 안치환이 부릅니다. 귀뚜라미. 함께 들어보시죠. DJ의 멘트 뒤로 노래가 흘렀다. 높은 가지를 흔드는 매미소리에 묻혀 내 노랜 아직 노래가 아니요~ 풀잎 없고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지하도 콘크리트벽 좁은 틈에서~ 어? 어어? 아! 만화책을 뒤적이던 철은 벌떡 일어났다. 누군가 뒤통수를 후려친 것 같아 좁은 방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신경질적으로 혼잣말을 내뱉었다. 와! 이 노인네 정말! 이거 모야! 와! 구라 친 거야? 그치? 나한테 구라 친 거지 이거!


잠깐이나마 서글픈 그의 타령에 감동했던 자신을 떠올리자 얼굴이 화끈거렸다. 철은 분이 풀리지 않는 듯 자리에 앉았다가 일어서길 반복했다. 와, 노인네 이거! 철은 신경질적으로 문을 열고 신발을 꼬였다. 가만두나 봐라. 씩씩대며 편의점으로 달렸다. 감히 날 속여? 고약한 영감탱이. 편의점 앞에는 노인이 의자에 반쯤 기댄 채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철은 빠르게 다가가 탁자를 쾅! 내리 쳤다.

노인이 무심하게 말했다.

-누구냐. 해 가린다.

-진짜 이러기야?

그러자 노인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말했다.

-이 놈이 미쳤나? 웬 행패야!

-구라 쳤더라. 영감?

철이 따지듯 소리치자 몸을 일으킨 노인이 앞에 있던 술을 따르며 말했다.

-너 나 아냐?

노인의 말에 뜨끔한 철이 당황했다.

-아 아니, 그건 아닌데... 저번에 한 번 왔었잖아.. 성민이랑... 왜 그때...

-그 고얀 놈들 중 하나로구먼.

-그래 뭐, 그건 그렇고...

철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려 했나 떠오르지 않아 골똘히 생각했다. 답답해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다가 생각났다는 듯 노인을 향해 소리쳤다.

-그거! 귀뚜라미 어쩌고 하던 거! 그거 노래더라?

노인은 관심 없는 듯 말했다.

-그게 뭐이. 듣고 싶음 니 놈도 여 앉아 살든가. 맨날 우에 스피커에서 나오는데 안 외고 배기냐?

노인의 뻔뻔함에 철은 발을 동동 굴렀다.

-와 진짜. 이러기야? 자기 얘기인 거처럼 처량 맞게 중얼대놓고?

-그게 왜 내 얘기여? 아이고 술맛 좋다.

철은 노인을 노려보았다. 내가 미쳤지! 노인은 남은 술을 마저 털어 넣고 뜨거운 햇살아래서 눈을 감았다. 씩씩거리며 노려보던 철은 잊어버릴 뻔했다는 듯 다시 말했다.

-별이 지네 어쩌고 한 것도 구라지!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철에게 들으라는 듯 알 수 없는 또 다른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철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내가 미쳤지 저 영감 말을 믿을 뻔했네 하마터면! 와, 지가 음악중심도 아니고 와. 철이 중얼거리며 콜라를 사서 나왔다. 막 벌컥벌컥 들이켜고 있는데 노인이 몸을 돌려 철에게 물었다.

-근데 너 왜 자꾸 오는 거냐? 며칠 전부터 저기 숨어 있던 놈이지?

놀란 철이 왈칵, 마시던 콜라를 바닥에 뱉어내며 말했다.

-내가 뭘! 언제! 편의점에 오는데 다른 이유가 있어야 돼!

노인은 피식 웃으며 다시 햇살이 비추는 곳으로 몸을 돌렸다. 어쩐지 기분이 나빠진 철이 노인의 앞으로 다가가 외쳤다.

-아, 무슨 상관인데! 여기가 영감 땅이야?

송아지처럼 씩씩대는 철에게 노인이 말했다.

-궁금한 게 많냐?

철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궁금은 무슨. 물고기가 어쩌고 하는 골 때리는 말이? 하, 영감한테 뭐가 궁금해서? 내가? 하!

그러자 노인이 재밌다는 표정으로 흥분한 철을 보았다. 철이 짐짓 아무 일 없다는 듯 입을 닫고 서 있자 이번엔 노인이 철이 있는 쪽으로 몸을 쑤욱 내밀며 말했다.

-마탄자라고 들어봤냐?

-그... 양탄자 그 그거?

-에이 무식한 놈~

-뭐! 왜!

-양탄자가 아니고 마탄자! 학살. 물고기 학살이다.

-그게 뭔 소리야.

-우리는 우리의 조상을 수치스러워하지. 인간이 물고기였다는 걸 믿고 싶지 않은 거야. 그래서 오래전부터 학살을 시작했던 거다. 물고기들은 어떻게든 자손을 번영시키려고 마지막 순간에 푸른 지중해를 향해 희뿌연 알을 뿌린다. 붉은 핏물과 함께 말이야. 희뿌연 알이 분수처럼 물속으로 퍼지는 장관을 보면 너도 놀랄 거다. 하늘처럼 파란 바다에 구름처럼 하얗게 퍼지는 광경을 말이다.


철이 인상을 쓰며 꿀꺽 침을 삼켰다. 그러자 노인이 눈을 가늘게 뜨며 철을 노려보았다.

-망아지 같은 네 놈도 인간의 근원을 보면 눈물을 흘리게 될 거다.

미쳤다고 하더니 완전히 돌아버린 영감이구나, 철은 생각했다. 그렇긴 해도 웃기는 구석이 많은 영감이었다. 철은 이 정신 나간 영감이 마음에 들었다. 저런 괴상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지껄이는 노인이라니 정말 괴상망측하지 않은가! 노인은 그런 철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다시 말했다.

-잘 들어봐라. 과거를 부끄러워하는 자들이 인간이란다. 나쁜 기억을 모두 없애고 싶어 하는 유일한 종족이라고 할 수 있지. 매일같이 의식적으로든 그렇지 않던 말이다. 생각해 봐라 너 그러냐 아니냐?

철이 눈알을 굴리며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뭐, 그 그렇긴 하지만.

다음 말을 더 들어볼 생각이 없다는 듯 노인이 틈을 주지 않고 말했다.

-거봐라. 그래서 인간은 시도 때도 없이 마탄자의 그물을 드리운단 말이지.... 뭐,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는 것이. 사실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지. 인간은 원래 그런 동물이니까. 과거를 부정하고, 현재를 인정하지 않은 채, 오지 않는 미래만 신봉하지. 그게 인간이다. 어이쿠! 저! 여어! 어이 김 씨! 어여 와! 그깟 빡스떼기 그만 줍고 술이나 한잔 받으라고!


멀리 박스를 주워 작은 손수레에 싣고 있는 다른 할아버지가 보였다. 전봇대 밑에서 젖은 박스를 뒤적이던 할아버지가 손을 흔들며 걸어오는 것을 본 철은 주뼛주뼛 발길을 돌렸다. 두 노인이 뭐라뭐라 얘기를 나누며 껄껄댔다. 미치긴 미쳤어... 철은 중얼거리며 발부리에 채이는 돌멩이를 신경질적으로 걷어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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