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맵다 매워

고추 말고 봉선화가

by Siho

이 감독과 논길을 걷고 있었다.

"여긴 지금 깨 농사 한참이에요, 저기 보이는 저건 말 무덤이고요. 예전에 충직한..."


부아아아 앙-

갑자기 퍼런 트럭한대가 지나간다.


"음? 이장님인데? 어디 가시지?"

이 감독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트럭은 터덩텅, 하고 먼지를 내며 서더니

뒤로 천천히 (사실은 매우 빠르게) 후진해 온다.


"어디 가~" 창문을 내리고 이장님이 햇살에 얼굴을 찌푸리며 말씀하신다.


"저 여기 시호 작가님 여기저기 좀 안내해 드리고요, 그다음에 저기 정 작가님이랑..."


"고추 따러 와- 빨리! 빨리 와- "

할 말만 하시고는 다시 부아앙 자리를 뜨는 이장님.


"저희, 지금 가야 하는 거예요?" 나는 눈이 동그래져 물었다.


"아뇨, 지금은 아닌 데 가긴 가야 할 거 같아요. 가실래요? 고추 따러?"


"네, 뭐 따로 할 것도 없고." 나는 은근 신이 났다.



고추밭의 터줏대감


빨간 고무칠이 된 장갑을 한 세트씩 지급받은 우리는 바로 업무에 투입됐다. 미션은 간단했다. 빨갛게 잘 익은 고추만 골라서 (빠르게) 따기! 얼기설기 제 멋대로 나 있는 줄기들을 피하는 것이 변수이긴 했지만 그래도 똑, 똑 꽤나 빠른 속도로 고추를 따 나갔다. 뙤약볕에서 한참 따고 있으려니 잠깐씩 머리가 아찔 했지만 귀여운 고양이가 이쪽저쪽 이랑과 고랑을 오가며 애교를 부리는 덕분에 힘듦이라곤 없었다. 역시 고양이는 옳아!



열심히 따자!


반 정도 땄을까, 이 정도면 꽤 빠르지 않냐고 잘난 척이라도 해 보려고 고개를 들었더니 이장님 내외는 벌써 한 라인을 다 따고 바구니를 정리 중이셨다. 헛헛.


"이제 다 땄으면 나와~~"


아뇨 아직은 시간이 좀. 금방 할게요!!!

아까의 딱 두 배 속으로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나와 이 감독의 손놀림. 이게 가능한 거였구나??

열심히 일한 대가로 우리는 시내에서 배달 한 특제 한우! 수제 버거를 먹을 수 있었다. 오. 한 시간 남짓 일한 새참으로 아주 훌륭 한 걸?

"다음에도 불러 주세요~"


글을 쓰면서 생각해 보니 그다음에 또 불러주시는 일은 없었다. 내가 실수로 덜 익은 고추를 너무 많이 땄던가...


배를 두드리며 저녁때 숙소에 돌아와서는 뭘 할까 생각해 보니

아하! 엊그제 약국에서 명반을 샀었지! 얹그제 받은 겹 봉선화를 어디 뒀더라... 맞다. 냉동실에 얼려두었었다. 그리고 봉선화 물 들일 때 꼭 불러 달라고 했던 옆방 정 작가와 저 멀리 함흥 민박의 윤 작가도 호출한다.

한 달음에 달려온 두 작가님.



흐흐흐. 바야흐로 피의 향연이 시작되는 것이지(?)

처음 혼자서 봉선화 물을 들일 때에는 절구도 절굿공이도 없이 그냥 그릇에 포크로 꽃을 으깨었었는데, 무려 두 명의 집단 지성이 추가되니 우리는 도구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무려 선스틱을 도구로 사용하는 지성인들.


가위로 꽃을 한 껏 조사 뿔고 (전문 용어 죄송합니다), 명반을 추가해 마구 으깼다. 마을 회관 부엌에서 빌려온 포일이 랩 역할을 톡톡히 해 냈다. 어릴 때 어머니가 해주시던 봉선화 물들이기는 랩과 실 묶음이었는데. 피가 안 통해서 손가락이 붉으락 푸르락 했던 기억도 새록새록 난다.


손이 부자유 한 채로 마음껏 수다를 떨면서 한 시간, 두 시간이 흘렀다.

이렇게 모여 앉아 하하 호호한 일이 아마도 처음이었을까? 나는 그랬다. 서로가 서로를 추켜세워 주며, 서로를 대단하다고 응원해주며 어깨정말 마음껏 웃었던 날이었다.


아차, 잊어선 안된다. 이제 포일을 풀어봐야 할 때다.

두둥.

아니 핼러윈에 다른 분장을 할 필요가 없겠다. 그저 겹 봉선화면 된다. 유혈이 낭자한 나의 해당화 펜션.

요즘에 서디대 탐정학과 온라인 수업을 한참 열심히 들었더니 자꾸 그쪽으로만 생각이...

비산흔의 경우 주저 한 흔적과...(혈흔 분석 그만해!)


밤 열한 시가 넘어 아직 색이 덜 물든 윤 작가님의 세 번째 손가락, 그리고 정 작가님의 엄지 리터치까지 끝나고서야 우리는 바이바이 했다.


모두 잘 돌아가요. 아참참, 가다가 누구 손 보여주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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