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댁 구경할래요
10.1(수)
오랫동안 숙소에 박혀 일 만 했더니 좀이 쑤신다. 마을 산책을 해야겠다. 추석이라 복작일 것 같은 마을이 생각보다 조용했다. 아직 연휴 시작이라 그런가?
천천히 걸어 예전에 당근이며 부추를 따 주신 어르신 댁을 지나려는데 오늘은 꽤 여러 분들이 모여 계신다. 뭔가 일을 하고 계신 것 같아 도와드릴까 하고 들여다보니 아드님이 버섯을 잔뜩 따 오셨나 보다.
“이 검은 게 다 뭐예요? “
“시꺼멓고, 무슨 털북싱이같이 생겨서. 곰 버섯이라 그래”
“그런 이름은 처음 들어요!”
“이건, 싸리버섯이고, 저거는...”
이거야 원. 당최 아는 버섯이 하나도 없다. 얼마 전에 시장에서 배운 싸리버섯 정도만 겨우 알아들었다.
할머님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왼쪽에 철쭉색 점퍼를 입으신 할머니에게 시선이 간다. 간혹 한 마디씩 거드시는데 꼭 우리 할머니를 보는 것 같아서. 조금 슬픈 마음도…
“아이고, 이제 가야겠-다(할머니 말씀 억양이 늘 이렇다)”
귀여운 할머니 얼굴을 조금 더 마주하고 싶은 욕심에 “할머니, 저 할머니 댁 구경해도 돼요?” 하고 호기롭게 따라나선다. 저 멀리 웃마을 제일 높은 곳에 사신다는 할머니. 할머니의 집은 과연 언덕에 있었다. 화사한 꽃밭이 언덕배기를 꽉 메꾼 곳, 올라가는 입구에 커다란 백구가 끔벅끔벅 나를 바라보고 있는 곳.
(할머니도 참 위험천만하게… 내가 어떤 사람일 줄 알고 나를 안에 들이신 것일까)
점심을 드시는 둥 마는 둥 몇 술 뜨시더니 벽에 걸린 캘린더식 수납통에서 약봉지를 하나 꺼내 털어넣으셨다. 캘린더 위쪽에 크게 할머니의 존함 세 글자가 적혀있다. 아, 철쭉 할머니는 김 씨셨구나.
나는 할머니와 노래를 부르고, 요구르트를 함께 까 마시고 텔레비전을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부엌의 천정 모서리에 검고 동그란 것이 매달려 있다. 속초에 사는 따님이 저걸로 어머니가 약을 제때 먹고 계신지 체크하는 거라고. 아, 그럼 지금도 따님이 보고 계시겠구나. 일어나 CCTV를 향해 인사를 드렸다. ‘저,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밤, 줄까?”
“밤요?”
“내가 주운 생 밤이다~?? 많이 안 준다~?? 알아서 먹어라~”
할머니는 냉장고를 여시며 예의 그 귀여운 말투로 나를 놀리셨다.
“웃자고, 웃자고지. 농담으로 웃자고 하는 말이니 오해는 두지 마라~”
할머니 오해는요. 어려운 걸음으로 언덕을 내려가 하나하나 주우신 밤을 나눠 주시는데 그 마음을 제가 어찌 오해하겠어요.
내일 점심때 동료와 함께 오겠다고. 맛있는 커-피를 타서 오겠다고 약속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할머니는 언덕 위에서 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 손을 흔들고 계셨다.
“계세요 할머니- 또 올 게요.”
또 온다는 말을 쉽게 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오늘도 그 말을 해버렸다. 정말 또 와야지. 그럼 되지.
숙소로 돌아오는 걸음이 올 때보다 무겁고 느려진다.
프로젝트 때문이 아니었어도 나는 할머니를 방문했을까. 목적에서 '시작'된 마음과 애정은 과연 괜찮은 것일까. 영감을 받고 과업을 이루기 위한 방문이 아니었다고 100% 자신할 수 있을까.
류 작가의 전화다.
“시호작가님, 잘 다녀오셨어요?”
“네…”
“즐거우셨나요?”
“음… 모르겠어요”
계속 남아있는 이 감정은 무얼까. 나는 참 행복했는데, 할머니도 분명 좋아하셨던 것 같은데 무언가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함께 다녀오지 않은 류 작가에게 이 기분을 설명한 들 제대로 이해시킬 수 있을지, 괜한 편견 같은 것은 걸 심어주는 것은 아닐지.
“밤 1차 삶아두신 거 오늘 페이스트 만드실 거죠? 저, 한 시간 정도 시간 나는데 잠시 가서 도울게요. 조금 있다 할머니 뵙고 온 이야기 자세히 좀 해주세요.”
밤. 그래, 내 감정에 휩싸여 밤을 잊고 있었다. 밤.
앞 집, 옆 동, 다른 민박, 그리고 작가님과 교회 집사님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밤들이 나에게 기증(?)되었다. 바야흐로 가을이라 그런가 사방에서 밤 타작 하는 소리들이 들린다 했더니… 평생 먹을 밤을 다 받은 듯, 흡사 마르지 않는 샘이었다. 하루를 꼬박 삶아내고 속을 모두 파내고 나면, 와아! 다음날 또 오병이어의 기적처럼 포대자루가 채워졌다.
나는 물과 알룰로오스 시럽, 밤을 파낸 다이스를 섞어 밤 라테 시럽을 만들면서 오늘 내가 생각하고 느낀 바를 류 작가와 공유했다.
‘옳은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고민 - 하지만 아트케이션에서 해야 하는 바가 과연 옳은 일 있어야 하는 건지- 우리가 만들어 대접할 라테가 이곳의 어르신들에게 무슨 의미가 될지. 일회성의 무엇이 되지 않게 할 수는 있는지, 앞으로의 방문에서 촬영을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촬영을 한다면 알려드리고 해야 하는지 아니면 먼발치에서 찍는 편이 좋은지에 대한 이야기들 까지. 너무 많은 이야기가 오가니 점점 더 어려워졌다.
“작가님,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될까요. 그냥, 아트케이션이라는 타이틀을 빼고 우리가 받은 어떠한 마음을 다시 그대로 돌려드리는 것뿐이라고. 우리가 어르신들께 밤, 대추, 옥수수를 사용한 음료를 만들어 대접해 드렸고. 그걸 찾아올 관객분들이 의미와 함께 마시는 그런 프로젝트라고. "
내가 겪은 것을 똑같이 경험하지 못했기에, 류 작가는 내가 왜 이렇게 마음이 어려운지를 전부 이해하지는 못하는 듯했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
“맞아요… 그런 의미이긴 하죠…”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떠한 결론은 맺지 못한 채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다.
“작가님, 이제 그만 일할까요. 나머지 밤 까는 것은 제가 내일 깨서 마저 할게요…”
“네. 그럼 저도 퇴근할게요”
앞으로도 나와 류 작가는 계속 고민을 나누고, 서로를 설득하며 프로젝트를 만들어 가겠지. 스스로가 완벽히 납득할 수 있는 지역주민과의 교류라는 것은, 더군다나 그 모호한 쓸모와 소용을 명확하게 하는 것은 (예상했듯) 생각보다 쉽지 않으며, 어쩌면 음료를 개발하고 레시피를 만드는 것이 간단할 정도.
두 작가가 이렇게 상념과 현타 같은 것들에 엎치락뒤치락하다가 운 좋게 무언가의 합의점을 뽑아낼 수 있다면, 아마도 그것이 비로소 프로젝트의 의미가 되는 것이겠지.
아, 계속하여- 꾸준히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