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거나 힘들거나 하지만 견뎌야 한다
Day 5 Mysore
Day 6 Belur
인도 여행에는 공식이 있다. 처음엔 괜찮다. 생각보다 인도 체질인 것 같고, 나랑 인도는 뭔가 통하는 것 같고 괜히 우쭐해진다. 하지만 반드시 온다. 배탈, 멀미, 체력 고갈, 그리고 갑작스레 밀려오는 "내가 이러려고 여기 왔나?" 하는 자아 붕괴의 순간. 그 고비를 버티면 어느새 나도 모르게 끝까지 가게 된다. 그리고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문득 깨닫는다.
"내가 인도를 완주했다고?"
귀국 후 한 달 정도는 인도 뽕에 취해 누구보다 열심히 산다. 이상하게 에너지가 넘치고 도전정신이 강해진다. 불교 경전엔 "고통은 깨달음의 씨앗"이라는 말이 있다.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 부처님이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인도에서 한 번쯤은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가끔은 부처님도 인도사람이니까 그런 말 하신 거 아냐? 싶기도 하다.)
슬리핑 버스 안의 깨달음
슬리핑 버스가 처음인 어른들은, 출발한 지 10분 만에 멀미를 호소하기 시작했다. 나는 다행히도 혼자 싱글베드에 누워 눈도 안 뜬 채 자고 있었지만... 갑자기 등짝이 쿡쿡 찔린다.
"기사님한테 휴게소 좀 들르지고 말해줘!"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켜 버스 기사에게 다가가 외쳤다.
"아레~ 바야~ 플리즈 플리즈 스탑 꺼로"
하지만 30분 동안 아무리 말해도 기사님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때 L 아저씨가 뭔가 결심한 듯 외쳤다.
"Toliet Toliet Toliet!!!!!!!!!!!!!!!!"
놀랍게도 버스는 바로 멈췄다. 이게 바로 인도였다. 논리보다 절박함 예의보다 절규. 몇 번을 가도 항상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는 곳. 그리고 매번 느끼게 된다. 인도에서 정말 불가능한 건 없다는 것.
Mysore
고생 끝에 마이소르에 도착했고 새로운 버스기사와 마주했다. "Jaya"랑 다르게 영어를 한 마디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짧은 힌디어로 호텔로 가자고 얘기했다.
https://maps.app.goo.gl/gKcfWgVuhx5u23u37
(호텔은 정말 좋은 호텔이었다. mysore 가게 된다면 꼭 다시 갈 것 같다.)
호텔에서 재충전을 하고 마이소르 궁전과 성 필로메나 성당을 보러 갔다.
https://maps.app.goo.gl/x1UDx7MgudKG8bmg7
마이소르의 북적이는 거리를 지나 성당 앞에 섰을 때, 갑자기 유럽 한가운데로 순간이동한 기분이었다. 인도식 화려함과 유럽식 대칭미가 섞인 궁전은 멀리서 봐도 위엄이 느껴졌다.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자 대리석 바닥이 발바닥을 서늘하게 감쌌고, 내부는 금빛 장식들로 가득했다. 소란스러웠던 하루 속에서 잠시 마음을 가라앉히기 좋은 공간이었다. 기도하지 않아도 괜히 두 손을 모으게 되는 그런 장소. 짧은 시간이었지만, 인도에서 느끼는 색다른 평화였다. 힌두교 문화가 강한 마이소르에 이렇게 예쁜 성당이 있는 건 신기했다.
https://maps.app.goo.gl/GeG16UrTjtS6BLJSA
그 이후 마이소르 궁전을 갔을 땐 5시였다. 입장료가 무려 1000루피가 됐지만 마감 1 시간 전이라 경비원이 퇴근했는지 게이트를 열어놓고 아무도 없었고 사람들이 다 그냥 들어갔길래 우리도 따라서 들어갔다. 1000루피를 아낄 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
외관부터 범상치 않았다. “무슨 생각으로 궁전을 이렇게 지었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 만큼.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니, 바닥은 대리석, 천장은 금박, 벽에는 온통 색색의 유리와 그림들이 보였다. 궁전 전체가 번쩍번쩍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고, ‘인도식 과함’이란 이런 거구나 싶었다. 하지만 진짜 궁전 내부는 또 돈 내고 들어가야 했다. 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빠르게 1시간 만에 다 돌아보고 나왔다.
L 아저씨와 경상도에서 오신 B 아저씨는 기필코 인도 양주를 오늘은 먹자고 하셨다. 인도 양주가 또 괜찮은 건 어떻게 아셔가지고 나를 데려가셔서 시장 요리 저리 돌아보고 1시간가량을 돌아보며 술 찾기 대장정을 펼쳤다. 우연히 데바라자 마켓을 들렸다. 좁고 빽빽한 시장에서 바나나도 사고 무화과도 먹으면서 셋이 즐겁게 돌아다녔다.
웃긴 아저씨 둘이랑 실없는 농담 하면서 돌아다니니깐 재밌었다. 이상한 뻥튀기 과자도 먹으며 돌아다니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Belur
벨루는 커피 농장이 유명한 곳이다. 벨루 근처 바바 부단 기리 산맥은 인도 최초로 커피가 들어온 지역이다. 그래서 그런지 벨루 지역에서는 커피 농장에서 직접 머물 수 있는 커피 플랜테이션 홈스테이와 팜투어가 인기를 끌고 있다. 우리는 마이소르에서 바로 벨루로 향했다. 숙소는 커피 농장을 함께 하는 Coffee Bean 숙소였다.
https://maps.app.goo.gl/BeZakwmcxpxUuoYn8
벨루 지역은 커피 농장 쪽으로 들어오면 할 게 정말 없었다. 근처에 식당도 없어서 무조건 숙소에서 주는 밥을 먹어야 했다. 살짝 허접한 밥을 보고 카레 섭지 다 됐고 그냥 깻잎에 고추장을 너무나도 먹고 싶었다. 어른들도 하나같이 질려하셨고 모두 음식을 다 남겼다.
우리가 할 건 커피농장을 걷는 일뿐이었다. L 아저씨와 B 아저씨랑 함께 하염없이 커피농장을 걸으며 커피 씨앗을 따보면서 놀았다. L 아저씨와 B 아저씨는 내 옆에서 천천히 걸었다. 둘 다 말 많은 성격이지만 이 길에서는 다들 이상하게 말수가 줄었다.
같이 있어도 서로 혼잣말만 중얼거리면서 바보처럼 웃곤 했다. 같이 있어도 굳이 의미 있는 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그냥 자연스럽게 다닌다는 게 이렇게 큰 평화일 줄은 몰랐다.
"이 나무는 20년도 넘었을 거야"
L 아저씨가 무심하게 말했다.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오래된 커피나무 옆, 아직 익지 않은 커피 체리를 바라봤다. 그 작은 열매 속에 우리가 매일 마시는 커피 원두가 두 알씩 들어 있다는 걸 이 여행에서 처음 알았다. 여행이란 건 늘 뭔가 새롭고 자극적인 걸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 조용한 산책이 왜 이렇게 좋은지, 커피나무만 봐도 왜 이렇게 마음이 채워지는 건지 나도 잘 모르겠다. 특별히 할 게 없지만 그저 아무 생각 없이 걷는 이 시간이 분명 여행이었다.
"생각 많아졌네 불러도 듣지 않고"
B 아저씨가 갑자기 내 어깨를 툭 쳤다.
주변에는 새소리만 들렸다. 그 순간 정말 소음이 사라진 것 같았다. 내면이 조용해지고 내가 지금 이 길 위에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 걷는 게 이렇게 좋을 줄이야.
그냥 걷는 것
그 자체로 좋은 시간
그게 내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여행의 가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