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함피란
함피는 내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
그때도 나는 어색한 사람들과 할 말이 없어서, 늘 그렇듯 인도 여행 썰로 시간 때우고 있을 때였다. 보통 인도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인도 인사말이 사와디깝이 맞지?" 하고 태국과 헷갈리곤 한다. 그래서 인도 여행 썰은 내 무적의 무기다. 그렇게 대화를 다 하다 보면 그래서 인도인들은 아직도 손으로 밥 먹고 해결하냐고 물어본다. 자세히 알려줘도 오로지 인도의 단편적인 모습만 궁금해하는 게 아쉬웠다. 하지만 내가 만난 V는 달랐다.
"너 함피 가봤어?"
그녀는 나와 만나기 전부터 함피에 반해있었다. 유튜브로 여자 혼자 함피 여행하는 영상을 보고 "어떻게 여자 혼자 인도 여행을 할 수 있지? 정말 대단하다!" 라며 감탄하다가 함피에 대해 찾아보다가 그 아름다움에 빠져 인도 여행을 꼭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오랜만에 인도여행에 진심인 사람을 만났다. 좋아하는 걸 말할 때 눈이 다르다고 들었는데 V의 눈을 보고 알 수 있었다.
Day 9~10 Hampi
나는 비룩팍샤 사원을 올려다봤다. 고푸람 형태 사원이라 하염없이 올려다봐야 했다. 그토록 갈망하던 함피에 드디어 왔구나. 그동안 수많은 인도 사원을 봐도 별 감흥도 없었는데 그녀가 나한테 말했던 사원은 꽤나 멋져 보였다. 신발을 벗고 난 천천히 사원 주위를 걸었다. 인도를 이렇게 자세히 들여다본 건 오랜만이었다.
비루팍샤는 '세 개의 눈을 가진 자'라는 의미로 시바 신의 별칭이다. 비제이나가르가 멸망해서 많은 사원이 무너졌지만 비룩팍샤 사원은 시바 신에게 예배드리는 곳으로 아직도 인도인들이 많이 찾는다. 인도인들이 푸자(기도)를 열심히 하길래 나도 그날따라 기도가 하고 싶었다.
"미련을 버리고 앞으로의 25년은 행복하게 해 주세요"
기도를 마치고 천천히 사원 근처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좁은 길에 아기자기하게 모여있는 상점가는 나름 산책코스로 좋았다. 거기에선 소장하고 싶은 옷도 있었다.
V는 힘든 일이 생겨도 여행 생각만 하면 괜찮아진다고 말하던 사림이었다. 그녀에게 "걱정하지 마 함피 여행 가서 재밌게 놀면 되지"라고 말하면 분명 좋아했을 것이다. 사실 나는 인도 여행이 재밌겠다며 나중에 꼭 같이 가자던 사람을 수도 없이 만났다. 대부분 예의상 하는 말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냥 그 순간만큼은 같이 여행하면 재밌겠다고 말해준다. V도 똑같이 같이 인도 여행 가자고 말했다.
그때만큼은 내가 살짝 기대했나 보다, 맞장구치기보단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어차피 안 갈 거 다 안다고 말했다. V는 자기는 진짜 다르다며 네가 갑자기 여자친구가 생기는 게 아니라면 자기는 무조건 가겠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 같으면 비웃으면서 무시했겠지만 그날따라 그 말을 믿고 싶었다.
계속 걷다 보니 비룩팍샤 사원 저수지를 지나서 툰가바드라 강에 도착했다. L 아저씨가 "뭐 그리 빨리 가냐"며 나를 붙잡았지만 지금부터 날 찾지 마세요라고 말하며 혼자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강가에선 시바신을 믿는 검은색 사리 같은 것을 입은 신도들이 몸을 씻고 있었다. 신기한 점은 두르고 있던 검은 천을 떠내려 보내는 것이다. 그들은 나올 때 속옷만 입은 채로 나왔다. 물 위로 검은 천이 떠내려가는 모습을 보며 '옷이 아깝지도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저들처럼 무엇하나 믿는 구석이 있다는 것이 부러웠다. 저렇게 씻고 나오면 그들의 마음은 치유될까? 아상에서 벗어나서 좀 더 성숙해질 수 있을까? 가능하다면 나도 이 강물에 몸을 맡기도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시몬스야 헤마쿠다 힐 가자"
잠시 방황하던 나를 L 아저씨가 잡으러 왔다. 뭔 일 있냐는 그의 물음에 그냥 함피가 너무 좋아서 그렇다고, 이제까지 했던 여행 중 제일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헤마쿠다 힐 또한 경치가 정말 좋았다.
헤마쿠다 힐은 시바 신이 명상했던 장소다. 파르바티 여신 또한 시바의 사랑을 얻기 위해 헤마쿠다 힐에서 기도했다고 한다. 그러자 그들의 아들인 가네샤 동상이 눈에 띄었다. 더 걷다 보면 무너진 유적지들의 모습이 보였다. 비록 사원들은 폐허로 남았지만 그 자체로 풍경과 어우러져 신비로움은 남아있었고 좋은 풍경을 볼 수 있었다. 그때 '그 자체로의 아름다움'을 생각하게 됐다.
V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 자체로 밝은 에너지를 발산하는 사람이라서 싫어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인기 많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는 늘 멀리서 지켜볼 뿐 먼저 다가갈 용기를 내지 못했다. 막상 그녀가 다가왔을 때조차, 내 안의 진짜 모습보다는 남들이 말하는 무난하고 평범한 가치만 보여주려고 했다. V랑 있을 때 너무 나 자신을 보여주지 못한 것 같아서 아쉬웠다. 다 무너진 유적이라도 그 자체로 아름답다고 사람들이 찾아오는데, 나는 왜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못했을까.
"여기 경치가 너무 멋지지 않아?"
V가 사진을 보여주며, 언젠가 같이 함피에 간다면 꼭 마탕가 힐에 오르자고 했었다. 일출이 장관일 거라며.
아침 일찍 숙소를 나서니, 일출을 보러 가는 한국인 누나 B를 만났다. 우리는 릭샤를 함께 타고 올랐다. 마탕가 힐은 길지 않지만 경사가 가팔라 안전장치도 없어 위험했다. 혼자였다면 겁났을 텐데, 누군가와 함께 오르니 한결 나았다.
B누나는 마치 V가 말하던 ‘혼자 함피를 여행하는 멋진 여자’ 같았다. 나는 농담처럼 “제 친구도 누나 같은 사람을 좋아한다”라고 말했다.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서로 인도 여행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해가 떠오르자, 서로 사진을 찍어주었다. 하지만 렌즈 너머로는 계속 V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그때 깨달았다.
아, 나는 정말 그녀를 좋아했구나.
이미 떠나갔고, 내게 남은 건 미련뿐이었다. 하지만 그 미련을 마탕가 힐에 내려두고, 천천히 산을 내려왔다.
https://maps.app.goo.gl/i8XY1hsCC6NgPWYy7
https://maps.app.goo.gl/ju5uvcVP1oJApcDf8
https://maps.app.goo.gl/FCsi88xPVeTGm7KFA
https://maps.app.goo.gl/4aQh2HdMUispu1Qx8
https://maps.app.goo.gl/HFiTyGCy41fbmZ4k9
https://maps.app.goo.gl/errgYCyMbTNt8Qbx8
-하누만 템플이 있는 곳인데 끝까지 올라가면 끝내주는 경치를 볼 수 있다. 신발을 신고 올라가도 된다.
https://maps.app.goo.gl/wecSFKLhqhV3NNGw8
- 염소 똥냄새는 좀 나지만 집주인이 굉장히 친절하고 숙소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