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서윤 Aug 23. 2021

황금별

미팅이 파주 외곽에서 잡혔다. 내가 사는 김포와 맞닿아있는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집에서 1시간 가까이 걸리는 장소에 운전석에 앉으면서부터 평소와 달리 핸들을 잡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첫 번째 톨게이트 통과. 아직은 키가 작은 가로수가 반듯하게 나란히 자란 길을 한참을 달리다 짧은 터널을 두세 번 반복해서 지나 두 번째 톨게이트 통과. 한참을 달리다 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선과 아직 20분은 더 달려야 한다는 네비의 지시에 이대로 북한으로 가는 건 아닌지 슬슬 겁이 나기 시작했다. 널찍한 4차선 도로 위 덤프트럭들 사이에 아주 작은 차 하나가 겁에 질린 채 달리다 드디어 800m 앞에서 우측으로 빠지라는 티맵의 지시에 따라 신나게 우측으로 빠져 비포장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또 한참을 꼬불 꼬불 좁은 길을 달려 우회전했다 비보호 구간을 몇 번을 왔다 갔다 하다 드디어 2층짜리 식당 앞에 도착했다.

다행히 북으로 가지 않았다.


그날의 메뉴는 심심하니 담백한 평양냉면.

무사 도착한 것에 대한 안심과 미팅을 잘해야 한다는 긴장감이 뒤섞인 혼탁한 감정으로 맛을 제대로 느낄 새도 없었지만 그릇을 싹싹 비우긴 했다. 방금 도착한 것 같은데, 본격적인 미팅은 식당이 아닌 근처 카페에서 하기로 했다.

식당에서 일 얘기를 나누는 것도 이상하긴 하지만, 솔직한 마음으로는 그냥 여기서 일 얘기를 다 끝내고 집에 가서 발 뻗고 자고 싶었다. 두 번째 고난의 드라이빙 장소는 식당에서 차로 약 20분 떨어진 카페 동네.


이 근방에 카페가 있을까 싶었는데 조금만 나가면 은평구라니 당황스러웠다. 도대체 난 어디에 있는 것인가.

두 번째 목적지는 식당과 거리가 가까워 집에서 출발할 때보다는 비교적 편안한 마음으로 운전을 했다.

맛있는 디저트와 함께 시작된 순조로운 미팅.



아니, 사실 사건의 시작은 지금부터다.

미팅이 순조롭지 못한 건 아니었으나 출발하기 전 핸드폰 충전을 하지 못하고 나와 45% 배터리 잔량으로 1시간 가까이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운전을 했더니, 카페에서 슬쩍 확인한 핸드폰은 어느새 9%만 남아있었다.

(긴장감을 풀기 위해 클래식 음악을 틀었으나 극적인 현악기에 심장만 더욱 세차게 뛰었다.)


“저, 혹시, 핸드폰 충전이 가능할까요?”


이 말 꺼내기가 뭐 그렇게 어렵다고, 미팅하는 내내 카페 관계자에게 말할까 말까 내내 기회만 엿보다, 이제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는 분위기가 되어 핸드폰은 충전도 못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씩씩하게 인사하고 복귀한 차 안.

남은 배터리는 4%


어느새 하늘은 어둑어둑해지고, 급히 티맵 지도를 확인했다.

골목을 빠져나와 사거리에서 좌회전 그다음 직진, 그다음 사거리에서 또 좌회전 그다음 큰길.

일단 큰 길만 가면 괜찮을 것도 같았다.


뭐라 설명해야 적당할지 모르겠지만, 극강의 두려운 상황에서는 긍정 파워가 치솟는 것 같다.

평소에는 맞게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 길을 잘못 들어설까 벌벌 떨면서 갔는데, 아니 조금 전 식당까지 오는 내내 두려움에 떨었으면서 오히려 배터리가 4% 남은 상황에서는 ‘해보자!’ 하는 마음이 드는 건 생존본능이려나.



하필이면 또 퇴근시간과 겹치고 말았다.

옆에서 끼어드는 차는 왜 이렇게 많은 지 도무지 앞으로 나아갈 생각을 안 한다.

3%

다시 복습. 좌회전, 그다음 직진. 그다음 사거리에서 좌회전. 그다음 큰길에서 우회전.

간다.

차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할 무렵, 분명 조금 전까지 3% 남았던 것을 확인했는데 갑자기 핸드폰이 암전 되고 말았다.

이제부터 실전이다.

좌회전, 좌회전, 우회전. 좁은 길은 무시하자.

그렇게 티맵으로 미리 외워둔 길을 따라 큰길까지 나왔다. 그런데 마지막 좌회전을 잘못했는지 큰길이 나오긴 나왔는데 뭔가 이상한 큰길이 나왔다. 그렇담, 이제 믿을 건 표지판이다.

앗, 기름도 빨간불이 들어왔다!


정말 총체적 난국이다.

어쩌면 지금 난 2021년에 대한민국 경기도 한복판에서 조난당하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조금만 더 버티자.

자동차든 나든.


여기로 가면 김포, 김포, 김포.


김포만 들어가면 집에 갈 수 있어!

김포, 김포, 김포.


표지판에 김포 공항만 보이면 눈에 빨간불을 켜고 핸들에 몸을 바짝 붙인 채 운전을 했다.

마침내 진입한 김포!

집에 갈 수 있다!


마침내 아는 길이 나왔다.

Mama I Made It!


*

약 7년 전, 칭다오에서 언니와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언니와 나는 칭다오 맥주 박물관에 가기 위해 택시를 탔으나 택시 기사님이 그곳은 재미없다며 다른 곳을 추천해 주시는 바람에 계획에도 없던 높은 타워를 가게 되었다.

(중국어를 할 줄 아는 언니의 언어 능력이 독이 되는 순간이었다.)

‘높은 타워’까지는 택시를 타고 잘 갔다.

사진도 찍고 커피를 마시고 아경을 보며 슬슬 내려가려는 순간, 우리 이제 어쩌지 싶었다.

그 ‘높은 타워’는 밤이 되니 조명조차 거의 없는 칠흑 같은 미지의 산 정상이 되었다.

그때 언니와 나는 살기 위해 하늘에 보이는 가장 반짝이는 별을 바라보며(우리는 북극성이라 짐작했다.) 약 40분간 하행을 했다.

그날이 너무나 인상적이었기에 언니와 나는 요즘도 간혹 별을 보거나 길을 잃었을 때, 칭다오에서의 그날을 얘기한다.


이전 16화 가지 마라,스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