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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신 케이 Jan 09. 2021

뇌의 멍한 휴식과 어느 커플의
화해

스토리포토그라피100

스토리 88 - 뇌의 멍한 휴식과 어느 커플의 화해


Rollei 35 TE, Agpa 200 / Seoul, S.Korea - Dec

 

한 4년 전쯤의 어느 여름날이었던 것 같다. 늦은 야근을 끝마치고 집에 왔다가 머리가 너~무 말똥말똥해서 심야영화 한 편을 보러 나왔다. 이 말똥말똥하다는 표현은 컨디션이 좋을 때 머리가 팽팽 돌아가는 상태라기보단 카페인 음료를 너무 많이 마셔서 잠은 안 오고 머리는 퀭한 상태에 가깝다. 피로한 눈을 통과해 뇌로 들어온 정보(예를 들어 밤에 매력적인? 책들이나 스마트폰에 들어온 메시지 등)들이 또렷하게 뇌로 스며들지 않고, 각자 빙글빙글 돌더니 스르륵 사라져 버리는 것 같다. 

여하튼. 심야영화를 봤다. 이 영화는 멍~한 상태의 머리를 가지고 멍~하게 보기 딱 좋았다. 그래서 정말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멍-하고 보았기 때문에 제목이 기억나질 않는다. 하하. 

영화가 끝나고 자정이 넘었지만 이대로 들어가기엔 뇌가 아직도 너무 말똥말똥한 상태. 그래서 근처의 24시간 카페로 갔다. 구석에 멍하니- 앉아 따뜻한 차를 마시면서 카페에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었다. 대부분 팝송. 게다가 제이슨 므라즈의 'Live High'같은 류의 잔잔한 노래들이 울려 퍼지니 머릿속에서는 대학생 때 캠퍼스에서 연애하던 추억들도 몽글몽글 떠다녔다.(대학생 때 한창 제이슨 므라즈의 노래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다음날은 쉬는 날이니 뭐.. 편하게 늦잠자도 되고. 약속도 없으니,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는 휴식의 새벽이었다. ‘좋다~ 좋아~ 휴식이란 이런 거지 암~ 굿굿ㅎ’이라고 뇌가 메시지를 보내는 것 같았다.

음.. 그런데...! 팝송에 섞여오는 옆 옆 테이블... 커플의 대화... 정황상 싸우는 것 같았다. 이젠 뇌가 어느 정도 휴식을 취했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이것저것 흡수하기 시작했나 보다. 그런데 이 커플의 이야기가 상당히 재미있었다. 일단 상황은, 싸운 후 화해하고 카페에서 다시 한번 서로의 오해를 정리하고 있는 중인 것 같았다. 다정해 보인다. 서로 손을 꼭 잡은 채 서로의 속마음을 솔직히 털어놓는 시간인 것 같다. 

"난 너한테 그렇게- 그렇고- 저렇고- 이렇고- 좋게 보이고 싶었어.. 그래서 그렇게, 이렇고, 저렇고, 조렇게, 행동했던 거야." 

"다 알지, 조금 더 이해 못한 내가 더 미안해"

이런 류다. 근데 신경이 쓰이는 건 그 커플의 싸우고 화해하는 과정이다. 둘이 다툰 후 여자가 남자 친구에게 사진을 보냈는데.. 그게.. 아는 오빠의 속옷(?!) 사진을 보냈단다. 속옷 사진을 일부러를 보여줬다는데, 여자가 그렇게 행동한 이유는 이렇다. 

"내가 너의 여자라는 걸 확인받고 싶었어. 너를 질투하게 해서 사랑을 확인하고 싶었어.."

음 잠깐잠깐! 나는 아직 머리가 멍한 상태여서인지(그렇게 생각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게 어떻게 화해의 결과로 이어졌는지 이해가 잘 안 되었는데.. 남자가 옆자리에 앉아 여전히 손을 사랑스럽게 잡아주고 있는 걸 보니 위 상황을 받아준 것 같았다(정말로?) 곧이어 이어지는 여자 친구의 사랑의 멘트. 

"우린 정말 대화가 잘 통하는 것 같아~ 어차피 그 오빠한텐 감정은 없었다구~ 난 널 더 사랑해-!"

그런가.. 여자의 마지막 말을 듣고 시간이 너무 늦어서 카페를 나왔다. 돌아오는 길에 좀 더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남자의 뇌도 지금은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는 '말똥말똥'한 상태인 게 분명하다. 남자의 뇌가 휴식이 끝나고 나서 제2차 대화가 무척이나 궁금한 새벽이었다. "근데.. 그 팬티는 어떻게 찍었니?"

아이고 상상을 멈출 수 없다. 이대로 계속하다간 5시쯤 잠들게 생겼네. 이런.


심야영화는 참 좋습니다! 사람이 거의 없어서 핸드폰 불빛 테러에서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 



스토리포토그라피라는 프로젝트를 기획하고서, 이야기를 발견하고 나서 사진을 찍는 게 보통이 되었다. 하지만 반대로, 이전에 그냥 찍어둔 사진들에서도 재밌는 이야기를 발견하기도 한다. 메모해둔 아이디어와 경험들,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 등 오랜만에 옛날 사진첩을 넘기다 보면 기록해둔 이야기와 매치되는 사진이 반드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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