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대째 우울을 앓고 있습니다.
단정한 교복차림으로 떨리는 마음을 숨긴 채 걸었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내가 향했던 곳은 대학병원 정신과 폐쇄 병동.
가족 모두가 말려도 멈춰지지 않던 울부짖음과 난동은 그를 이곳에 데려다 놓았다.
정해진 시간이 되어야만 들어가서 면회가 가능했다.
초조한 마음으로 그렇게 시간이 다 되기만을 기다렸다. 학교에서 깔깔 웃기만 할 수 없었던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나의 기억.
약에 취한 듯 멍하게 누워있는 아빠의 검사 결과 뇌가 70세까지 늙었다는 것이었다. 모든 기능이 떨어져 버렸는지 돋보기를 쓰고는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두려움 속에서도 반가운 마음도 잠시, 여전히 많은 이를 의심하는 말들을 뱉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병실에서도 친화력을 발휘하여 여러 사람과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다만, 어린 나에게 정신병동 환자들 모두는 무서운 존재이기만 했다.
두려운 첫날의 면회가 끝났다.
나는 할머니 손에 끌려 근처에 사신다는 할머니의 사촌, 육촌까지 생전 뵌 적도 없는 어른들 앞에서 불쌍한 표정을 짓고 앉아 있어야 했다.
할머니가 상황을 얘기하시고는 친척들을 불러 모은 모양이었다. 고향인 서울을 두고 지방에 내려와 고생하며 일어난 아빠의 상황들을 할머니께서 늘어놓으셨다. 친척 어른들은 애처롭게 들어주셨다.
그러고는 돈을 모아 내 손에 100만 원을 쥐어주셨다.
유쾌하지 않았고,
불쌍해 보이는 내 모습이 싫었다.
소녀 가장이 된 것 같은 이 상황이,
나에게 어른스러움을 강요하는 것 같은 무거움이 너무 싫었지만 그저 감사합니다 하며 깍듯이 인사를 드릴 뿐이었다.
두 번째 면회였다.
아빠가 자살 소동을 피워 감금당했다고 했다.
죽으려고 혀를 깨물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했다. 내 마음은 무너졌고, 두려웠으며 이 어둠의 끝은 어디일까 그저 막막했다.
죽는 것도 마음대로 안 되고 결국은 묶여버려 실패로 돌아갔다는 아빠의 푸념을 나는 어떤 힘을 더 내어 들어야 했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여전히 아프다.
몇 달이 지나고 퇴원 의사를 밝혔다.
사실 나는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또 같은 상황이 반복되면 어떡하나 떨렸다. 사업을 접어야만 했던 그 상황 속에서 세상에 대한 원망은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몰랐던 건가 싶다.
의사 소견은 이틀 정도 집에서 자보고 별 문제가 없으면 다시 병원으로 왔다가 퇴원을 해보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긴장된 마음으로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갔고, 그렇게 마당에서 아빠와 부둥켜안고 울었던 기억이 난다.
다행히 이틀을 편안하게 잘 지내고 병원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병원에서 알게 된 여학생이 “아저씨 나가게 되면 꼭 햄버거 좀 사다 주세요.”라고 했다며 햄버거를 반드시 사서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햄버거를 손에 쥐고 병원으로 다시 들어갔다.
그때 해맑았던 그 여학생의 얼굴이 떠오른다.
병원에서 나온 뒤 한동안은 평화가 찾아왔다.
하지만 그 이후로 수면제를 한 통을 털어 먹어 응급실에 실려간 적도 있고, 응급실에서 내가 의사를 도와 위세척을 돕기도 했다. 화를 낼 수는 없었다.
아빠는 그렇게 세상에 대한 원망 또한 열정적으로 했다.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와중에 영어성적이 좋아서 교비로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나에겐 꿈같은 일이었고, 처음으로 내 인생에 다른 시나리오를 받아들이게 된 순간이었다.
단돈 30만 원을 들고 가게 되었지만, 벗어날 수 있음에 감사했다.
미국에 도착하고 몇 주가 지나고 기숙사 전화로 집에 전화를 걸었다.
아빠가 회사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알려왔다.
당시 40대 중반,
지금 내 나이와 얼마 차이 나지 않던 당시의 아빠는 아이 셋을 등에 지고 얼마나 외로운 사투를 벌였던 건가 싶은 생각이 문득 들 때가 있다. 그 이후로 정년퇴직까지 부단히 노력하며 사셨다.
우울증 약을 먹어가며 버티고 주간, 야간 가릴 것 없이 일을 하시고 그렇게 빚을 갚아 나갔다. 한 푼 두 푼 아껴 집도 장만하고 이사도 하며 아팠던 시간이 조금은 보상받는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60세가 훨씬 넘은 지금은 그렇게나 좋아하던 술도 끊고 나름의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신다.
더 이상의 고통은 없기를 바랐지만, 아픔 이후의 상처는 쥐도 새도 모르게 온몸이 퍼져있었나 보다.
그렇게 가끔 나는 진흙탕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경험을 한다. 가끔 소식을 듣던 친척들이 우울증으로 힘들어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최근에는 내 동생이 오랜 우울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삼대째 겪고 있는 이 우울이란 녀석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졌다.
그렇게 나는 이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