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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길동 Jan 08. 2021

물고 물리는 관계

공무원 생태학


민원이 들어왔다. 지방청에서 여러 번 처리한 사안이다. 안 되는 건이다. 법령도 명확하고, 재판도 끝나 구제해 줄 방법이 없다. 누구보다도 민원인이 잘 안다. 민원인도 생계가 달린 문제니 포기할 수 없을 것이다. 법적으로 해결되기 어렵다는 걸 알기에 끊임없이 민원을 내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원하는 회신은 오지 않을 것이므로 민원인은 더 강력하게 민원을 제기할 것이다. 민원과 회신이 반복될수록 민원의 강도는 눈뭉치처럼 커져만 간다.


민원인은 감사실에 담당 공무원을 처벌해 달라는 민원을 넣는다. 감사실이라고 별 뾰쪽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답변은 해야 한다. 감사관에게 전화가 온다. 잠깐 와서 설명해 달란다. 위축된다. 승진심사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이게 뭐란 말인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감사실로 올라간다. 무엇을 물어볼까. 어떻게 답변할까. 민원인이 원망스럽다. 


사무실에 들어가니 감사관이 밝은 표정으로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감사장으로 가서 잠깐 얘기하시죠.” 내 이럴 줄 알았다. 감사장 문을 여니 어둡다. 구석의 스위치를 켜자 감사장이 환해진다. 감사장은 이렇게 생겼구나. 디귿자 모양의 탁자에 컴퓨터가 잔뜩 있다. 감사관은 컴퓨터 의자에 앉고, 나는 모니터 뒤를 보고 앉는다. 모니터 빛 때문인지 감사관의 얼굴에 푸른빛이 돈다. 이것저것 물어본 후 확인서를 써달란다. 끝에 이름을 쓰고 서명한다. 무슨 포기각서를 쓰는 것처럼 불쾌하고 찝찝하다. 그래도 문답서 받지 않은 게 어딘가. 서명한 확인서를 건네받자, 감사관은 빚을 받아낸 사람처럼 밝은 얼굴로 다시 친절해진다. 


민원은 커지고 커져 마침내 집단민원이 된다. 반복민원 대처도 힘겹지만, 민원이 한데 모이면 곱으로 강해진다. 얼룩말, 물고기가 떼지어 다니듯이 집단에는 힘이 있다. 핵심은 집단에 있다. 이슈가 만들어진다. 기사거리임을 알아차린 기자들이 모인다. 뉴스를 본 구청장, 시장은 한 마디씩 보탠다. 시민의 어려움을 함께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 다짐한다. 올해에는 국회의원 선거도 있다. 민원인들은 국회의원실에 모여 찾아간다. 어려움을 호소하지만 자신들이 곧 표임을 은근히 보여준다.


전화를 받으니 의원실 보좌관이다. 꼬치꼬치 묻더니 자료를 보내달란다. 국회의원이 자료제출을 요구하니 보낼 수밖에. 다음 날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의원실에 와서 설명하란다. 아. 힘들다. 의원실에 가기 전에 자료를 정리한다. 과장님, 국장님, 실장님이 검토한다. 모두들 국정감사장에서 장관님이 질책당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한다. 정무적, 실무적 능력의 최고치를 가동한다. 가동된 만큼 수정에 수정을 더한다. 수정한 만큼 보고서가 쓰여지고 버려진다. 10쪽 짜리 보고서가 겨우 마무리된다.


택시를 타고 여의도로 간다. 언제나 그렇듯 국회정문에는 시위하는 사람으로 가득하다. 박스로 만든 바람막이, 시위텐트, 휴대용 마이크에서 흘러나오는 한 맺힌 소리, 대자보를 몸에 두른 아저씨, 빨간 띠를 두른 청년, 십자가를 맨 아주머니, 그 사이를 서성거리는 경찰. 언제나 그렇듯 날선 긴장감 같은 건 없다. 웅얼웅얼 들리는 익숙하고 노곤한 장면을 지나 의원회관으로 들어간다.


하나마나한 과장님의 불평과 투덜거림을 걷는 내내 계속된다. 의원실로 올라간다. 상임위원회 행정실에 들러 의사일정을 확인하고 조율해본다. 뭐 달라질 건 없다. 대부분 일방적으로 알려주면 그에 맞춰 준비하면 된다. 그래도 행정실과 잘 지내놓으면 조금 빨리 알 수 있으니 눈인사는 하고 가는게 좋다.


의원실이다. ‘보좌관님께 설명 드리러 왔습니다.’ 말하며 의원실에 들어선다. ‘오셨어요?’라는 건조한 말과 함께 회의실로 안내 받는다. 마치 매뉴얼에 있다는 듯이 명함을 교환하고 질문과 답변이 이어진다. 설명하러 갔지만 내가 질문을 고를 순 없다. 묻는 것에 답한다. 공무원은 그저 방어한다. 여기서 밉보이면 장관님이 힘들어진다. 


왜 그렇게 했는지 설명해보란다. 법령에 명확히 쓰여 있고, 판결이 확정되었는데 뭘 더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그래도 그렇게는 말할 수 없다.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이며 듣는다. 곧이어 성실히 답변한다. 보좌관은 다시 물어본다. ‘다른 대안은 없느냐’, ‘민원이 해결되지 않으면 국정감사장에서 질문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건 대다수 국민이 바라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가 ‘공무원이 무슨 국민의 의견’을 얘기하느냐며 호통을 친다. ‘국민의 대표’라는 단어의 종주권을 주장하는 꼴이다. 참.


그렇더라도 표정이 굳어져서는 안 된다. 보좌관이 꽂히면 의원님이 장관님께 질의한다. 장관님은 호통 같은 질문을 듣기만 하고 답변할 시간도 얻지 못할 것이다. 곧이어 예산심사가 있으니 장관님이야 참을 수밖에 없다. 예산이 통으로 삭감될 수 있다. 예산은 언제나 부족하니 무언가는 삭감될 수밖에 없다. 우리 부처 사업이 좌초될 수도 있는 것이다. 예산심사라는 절벽이 등 뒤에 있기에 장관님은 어떻게든 버티고 버텨야 한다.


민원인들과 소통해서 최선의 대안을 모색해 보겠다고 보좌관에게 말한다. 공손히 인사하고 의원실을 나온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는데도 기를 쏟고 나온 듯 몽롱하다. 


과장님이 쓸쓸히 앞서 걸어간다. 

과장님이 갑자기 멈춰서더니 오던 길을 씩씩하게 돌아간다.

 

“왜 그러세요?”

“나 저기 다른 의원실에 좀 들를께”

“왜요”

“그냥. 따라와”


과장님이 홍○○ 의원실에 들어간다. 나도 뒤따라 들어간다. 스마폰에 눈이 꼽혀 있던 비서관은 파티션 사이로 얼굴을 빼꼼 내밀고서는 “어떻게 오셨어요?”라고 묻는다.


과장님은 눈을 마주치며 조용히 말한다.

“저 지역구민인데요”


비서관은 눈웃음과 함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저기 앉으시죠.”

“차는 뭘로 드릴까요”


비서관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과장님과 하나마나 한 얘기를 이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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