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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길동 Feb 03. 2021

어디선가 쓸쓸히 늙어가고 있을 매뉴얼의 일대기

공무원 생태학 (fiction)


세종에서 서울역은 겨우 한 시간인데 졸지 않은 적이 없었다. 국장님과 함께 가는 길인데도 한 참을 졸았다. 오랜만에 서울역이다. 역을 나오자 눈이 부셨다. 눈이 저절로 감기며 살짝 찌뿌려졌다. 하늘은 그만큼 쨍했다. 우리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고 있었고, 버스와 택시는 남대문경찰서를 배경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사님 경복궁 뒤에 있는 영풍문 가주세요'

'네? 그게 어디있어요? 난 모르겠는데요. 잠깐만요. 네비도 안찍히는데요.'

'그래요? 일단 광화문 쪽으로 가주세요. 이후엔 제가 알려드릴께요'


'연풍문'하면 택시기사는 다 알꺼라더니, 다 헛소리였다. 혹시나해서 청와대 홈페이지에 들어가봤길 다행이다. 국장님 모시고 왔는데 덤벙댈뻔 했다. 어쨌거나 청와대도 다 가보고 나도 출세했구나. 연풍문은 어떻게 생겼을까. 궁궐 입구 같은 거 아니겠는가.


기사는 차선을 이리저리 바꿔가며 능숙하게 광화문을 향했다. 오랜만의 서울이라 나도 몰래 차창에 붙어 앉아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교보문고에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는 커다란 글씨가 걸려있다. 언제봐도 멋진 말이다. 세종대왕 동상 뒤로 광화문이 보였다.


'기사님, 좌회전이요. 경복궁 끼고 쭉 돌아주세요.'

'거기 지나갈 수 있어요?'

'네 갈 수 있어요. 빙돌아서 신호등 앞에 내려주시면 돼요.'


택시에서 내렸는데 청와대 홈페이지에서 봤던 궁궐문은 없었다. 신호등 건너에 2층 건물하나가 사무적으로 서 있었다. 회의실에 들어가니 벌써 많이들 와 있었다. 실무자들은 서류를 뒤적이고 국장님들은 서로 명함을 교환하느라 바빴다. 실무자들은 국장님들 책상에 자기 부처 자료를 배포했다. 자리마다 하나 둘 쌓여 거의 200쪽은 되어 보였다. 누군가 아이스라떼 한 잔을 가져다 주었다. 빨대로 들어오는 라떼는 시원하고 고소했다. 이 작은 걸로도 여유가 생겼다. 국장님들은 책상에 앉았고 실무자들은 얼른 그 뒤 접이식 의자에 챙겨 꽂꽂이 앉았다. 


회의는 시작되었다. 이번 사건의 원인과 대책을 부처별로 발표했다. 사건을 예방하지 못한 아쉬움, 초동조치 미흡 원인, 컨트롤타워와 통합매뉴얼의 부재가 논의되었다. 이 자리에 모이지 않았어도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그런 얘기가 오갔다. 다 좋고 좋은 얘기였다. 회의 말미에 가장 중요한 논의사항이 남아 있었다. 어느 부처가 주무부처가 될 것인가의 문제다. 그 부처의 실무자가 매뉴얼을 만들게 될 것이었다. 그 와중에도 국장님들은 안타까움, 사건에 대한 분석과 통찰력을 돌아가며 뽐냈다. 그러면서도 미루는 듯, 미루지 않는 듯한 말들이 오갔다. 무림의 고수들이 칼을 빼지 않고 자웅을 겨뤘다. 승부가 갈리고 주무부처가 정해졌다. 다행히 우리부처는 아니다. 곧이어 두 가지가 결정되었다. '첫째, 주무부처에 각 부처 실무자를 팀원으로 하는 TF를 설치한다. 둘째, 사건에 대한 통합 매뉴얼을 만들어 재발을 방지하고 앞으로 신속하게 대응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회의가 끝나자 다시 밝게 인사를 나눴다. 택시가 잡히지 않았다. 빈택시가 연풍문 앞에 있을 리가 없다. 국장님과 실무자들이 택시를 잡으러 큰 길 쪽으로 걷는다. 다른 부처의 실무자들처럼 국장님 반발짝 뒤에서 고개를 끄덕거리고, 추임새를 넣으며 따라 걸었다. 부처가 다른데도 모두 비슷하게 걸었다. 그렇게 각자의 일터로 돌아갔다. 


에스컬레이터가 나를 서울역 승강장에 사뿐히 내려주었다. 국장님은 특실칸으로 가셨다. 이제 혼자다. 일도 끝났고, 국장님도 안계시고, 편안하다. 국장님이 그렇게 편안하게 해주시는데도, 안계시는 게 더 편안하다는 사실은 언제나 당연한 듯 신기하다. 책을 폈지만 이내 졸음이 온다. 졸면서 가기엔 자유로운 시간이 아깝다. 아이패드를 꺼냈다. 넷플릭스를 열자 졸음이 금새 가신다. 1시간동안 애니메이션을 보고나니 사무실에 도착해 있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회의결과보고서를 만들었다. 주무부처 담당자인 장사무관은 멍해져있을 것이다. TF라는게 대부분 인력이나 예산이 충원되지 않는다. 성과가 나는 일이라면 사업부서에서 직접하지 TF가 만들어지지도 않는다. 게다가 TF업무는 모두의 업무에 걸쳐 있어 누구의 업무도 아닌 경우가 많다. 그만큼 성과를 내기도 어렵고, 생색나는 업무가 아니다. 저녁을 먹고 사무실에 돌아와보니 장사무관에게 메일이 와 있었다. 연풍문 회의자료를 자신이 보내준 서식에 맞추어 보내달란다. 다음 주 월요일에 실무자 회의를 하겠단다. 편집이야 뭐 매일 하는 일이니 그런 건 일도 아니다. 


월요일이 되어 TF에 갔다. '고생하시죠?'라며 위로하는 인사를 서로에게 돌렸다. 장사무관은 자기 부처가 왜 주무부처가 되었는지 모르겠다며 앓는 소리를 했다. 부처 담당자들 모두 안도하며 위로와 격려의 말을 건냈다. 

우리의 목표는 컨트롤타워와 매뉴얼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번 사건과 관련한 소관부처 중요내용을 설명했다. 혹시 빠진 게 있는지, 절차와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서로에게 확인했다. 


매뉴얼을 만들면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는 어렵다. 매뉴얼이라는 게 대부분은 법률, 대통령령, 부령, 훈령, 예규, 고시를 모아 놓은 것이다. 거기에다 판례, 유권해석, 사례, 담당자 연락처 따위를 추가한다. 규정을 요리저리 버물여 조직도나 순서도도 만들어 넣는다. 우리가 만드는 매뉴얼도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아마도 우리가 만들려는 매뉴얼은 부처별 매뉴얼을 섹션별로 모아놓은 커다란 매뉴얼이 될 것이다. 아주 두꺼운 책이 될 것이다. 두껍다는 면에서 새로울 수는 있겠다. 컨트롤타워가 만들어졌으니 무언가 창조는 되었다.


역시 모두 베테랑이다. 2주가 지나자 매뉴얼은 완성되었다. 이제 우리는 매뉴얼대로만 하면 된다. 아니, 매뉴얼대로 해야만 한다. 공무원이 법령에 따른 재량권을 행사하였어도 매뉴얼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문책받기 십상이다. 언론이나 국회의 공격을 버티기 어려울 것이다. 새로운 교범이 생긴 만큼 복지부동의 방패 하나가 새로 탄생한 것이다. TF는 전격적으로 등장하고, 있는 듯 없는 듯 사라진다. 매뉴얼과 상관없이 법령이나 행정규칙은 수시로 개정될 것이다. 매뉴얼은 조금씩 현실과 동떨어지게 될 것이다.


나는 다시 평소처럼 전화를 받고, 보고서를 쓴다. 뉴스채널에 재발방지 대책이 보도된다. 기자회견장 구석에 장사무관이 다소곳이 서 있다. 장사무관 부처 국장님이 브리핑을 한다. '신속한 초동조치를 위한 컨트롤타워가 만들어졌습니다. 또한, 관련부처 전문가들 의견을 반영해 모든 상황에 대비한 매뉴얼이 일선에 배포되었습니다. 다시는 안타까운 사건이 재발되지 않도록...' 브리핑이 끝까지 나오지도 않고 편집되었다. 화면은 바로 다음 뉴스로 바뀌었다.


화장실에 가다 국장님을 만났다. 

‘이 사무관! 뉴스 잘 봤어. 잘 끝났네, 수고했어!’ 

밝게 웃으시며 어깨를 툭 쳐주신다. 이렇게 이벤트 하나가 끝났다.


이제 매뉴얼은 어느 사무실 책장에서 쓸쓸히 늙어갈 것이다.

다른 매뉴얼들의 일대기처럼 조금씩 잊혀질 것이다. 


2008년 32대의 소방차가 5시간 넘게 물을 뿌렸으나 모두 불타버렸던 국보 1호 숭례문(출처: 위키피디아)



청와대 홈페이지 '연풍문' 안내화면



https://blog.naver.com/pyowa/222229748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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