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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길동 Aug 09. 2021

창가에 도착하면 어느새 중년이 된다.

공무원 생태학-fiction

승진명단에 내가 있다. 출중해서 한 승진이 아니다. 대부분 승진되는, 할 때가 된, 축하받기도 어색한 그런 승진이다. 그래도 승진명단을 눈으로 봐야 진짜 승진 아니던가. 다행이다. 지금 나는 사무실 막내다. 문꼬다리에 앉아 있다. 모두 내 뒤를 스쳐듯 지나간다. 누구라도 그렇듯. 힐끗 내 모니터를 본다. 보고서를 쓰는지, 결재를 상신하는지, 메신저를 쓰는지, 카카오톡을 하는지 힐끗 본다. 정확히는 보인다. 과원 모두 내 모니터를 본다는 건 왠지 내가 훌러덩 보이는 듯한 느낌이다. 직급이 낮으니 업무는 어쩔 수 없다손쳐도 내 자리가 너무 싫다. 이제 이 자리도 안녕이다. 훗.


얼마있다 보직명령이 났다. 이제 막내자리도 안녕이다. 문꼬다리 자리도 안녕이다. 새로운 사무실에 인사가야겠다. 흔쾌히 나를 받아주셨으니 인사는 가야겠지. 새로운 사무실에 간다.사무실 모양은 조금 다르겠지만 배치는 비슷할 것이다. 기대된다. 사무실 문을 열었다. 몇이 나를 쳐다본다.


"안녕하세요. 이번에 발령받은 고길동 주무관입니다.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어휴. 당일날 오셔도 되는데, 이렇게 오셨네요."

"인사도 드리고, 제 자리도 보려고요."


과장님 인상이 참 좋으시다. 같이 일할 사무관님과 셋이서 믹스커피 한 잔으로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내 자리는 서무사무관님 옆자리다. 서무라인과 과장님 책상 사이에 낮은 서랍장이 있다. 과장님이 우리 자리에 바로 올 수는 없지만, 일어서면 바로 우리 모니터가 보이는 그런 자리다. 사무관님 한 명만 내 뒤로 지나간다. 과원 10명이 내 모니터 뒤를 지나가는 지금과 비교하니 승진이 실감난다. 정말 승진이란 좋은 거다.


근무했었던 사무실을 떠올리니 사무실 모양은 달라도 자리배치 철학은 똑같았다. 사실 철학이랄 것도 없다. 승진을 하면 창가로 한 칸 간다. 또 승진하면 한 칸 더 간다. 창가가 전망이 좋지만, 그게 이유가 아니다. 자리배치의 철학적 이유는 그 자리를 다른 사람이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누구도 그 사람의 모니터를 볼 수 없으며, 따라서 뭐 하는 지 알 수 없다. 과장님 자리로부터 먼 창가쪽 자리라면 최고의 자리겠지. 새로운 사무실 과장님 자리는 사무실 끝부분 낮은 서랍장 뒤다. 낮은 서랍장을 돌아 들어가 회의탁자를 지나야 과장님 모니터를 볼 수 있다. 과장님 빼놓고는 볼 수 없다는 얘기다. 사무실에서 모니터 볼 수 없는 가장 어려운 자리가 과장님 자리다.


창가로 한 칸 한 칸 가다보면 결국 창가에 도착한다. 도착하면 어느새 중년이 된다. 그리고 더 열심히 열심히 승진해서 과장이 되면 회의테이블 뒤에 책상을 배정받는다. 그리고 정말 정말 운이 좋으면 국장이 되서 내 사무실을 배정받는다. 창가쪽 사무관님들을 보니 조금 짠하다. 창가쪽으로 한 칸 가기위해서 얼마나 많은 보고서를 썼으며, 얼마나 많은 야근을 했을까. 나도 창가쪽에 앉으려면 선배들의 길을 거쳐야하겠지.


그나저나 과장님이 자주 서랍장에 기대어 말씀하신다. 하필 내 모니터가 훤히 보이는 자리다. 정식 출근하면 일단 화분부터 좀 사야겠다. 낮은 화분을 서랍장에 올려 놓으면 좀 낳겠지. 내 자리도 조금 가리고, 과장님도 푸르름에 가려 아늑하다고 느낄 수 있겠다. 과장님이 좋아하실 수도 있다.


'고길동 주무관. 센스있네' 하시면서 말이다.




https://blog.naver.com/pyowa/222463306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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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생태학(fiction)

1. 창가에 도착하면 어느새 중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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