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 생태학
사고가 터졌다. 화면에 도랑에 쳐박힌 컨테이터 트럭이 보인다. 도로 안쪽에 전봇대가 박혀있다. 전봇대 밑에 작은 나무까지 자라고 있다. 길에 전봇대를 박은 건지, 전봇대가 있는데 길을 넓힌 건지 알 수 없다. 박혀 있는 전봇대를 피해 트럭이 곡예운전을 한다. 트럭에는 무진동으로 옮겨야 하는 고가의 정밀기계가 가득실려 있단다. 전봇대를 옮겨주지 않아 이지경이 되었다는, 울먹이는 화물주의 인터뷰가 흐른다. 곧이어 '불법 도로확장이어서 옮겨줄 수 없다'는 소리에 관계공무원이라는 자막이 깔린다. 오른쪽 구퉁이에 작은 원으로 전문가라는 사람 사진이 뜬다. '복지부동 행정의 전형이며 시대를 반영하지 못한 탁상행정이죠'라며 뭐라뭐라 계속 말한다.
멍하다. 지금은 멍할 시간도 없다. 전화가 빗발친다. 과장님, 국장님, 대변인실에서 경위가 무엇인지 보고하라고 한다. 나는 안다. 빨리 썼다가 틀리게 되면 그것은 그것대로 수습이 안 된다. 그래도 뭐라도 써야 한다. 언론대응 기준을 작성하고, 예상질의와 모범답변을 정리한다. 작성하면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데이터를 보강한다. 언론에 기사가 났으니 국회에서는 관련자료를 요구할 것이다. 보고서는 점점 정교해져 사고확률에 대해 비교분석하라고 하고, 다른 나라 실태를 보고하라고 할 것이다. 국회 설명자료는 천하무적을 목표로 가공되고 강화될 것이다.
법령과 지침 위반사실은 발견되지 않았다. 새롭게 시행한 사업도 아니다. 사건에 언론에 노출되자 그 순간 아무 생각없는 시장의 걸림돌이 되버렸다. 법령을 왜 그렇게 해석했느냐고 다그친다. 유권해석이나 판례도 그렇게 해석하고 있다고 답변하면, 법령 개정을 위해 무슨 노력을 했느냐고 다시 묻는다. 이건 대화가 아니니 그저 앉아서 혼나는 수밖에 없다. 법령이 보호해 왔던 공익, 폐지되었을 때 부작용, 규정이 사라졌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새로운 효과, 신뢰보호는 말도 꺼내보지 못했다. 그저 허겁지겁 대응할 뿐이었다. 법령은 폐지되었다. 나는 적폐가 되었고 규제는 개혁되었다. 나는 시대의 변화를 읽어내지 못한 구태의연한 공무원이 되어 버렸다.
규제는 공익을 담보하는 것인데, 내가 보호했던 공익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규제를 허겁지겁 없애며 내 공익은 어떻게 판단되었을까. 쓸데 없는 것이 되었을까. 다른 공익에 밀려 정지된 것일까. 보호하는 법령이 바뀐 것일까. 적폐의 원점이 되어버린 나는 그동안 무엇을 위해 일 해왔단 말인가. 미관말직인 나는 모르겠다. 누가 나에게 가르쳐주지도 않는다. 그저 규제개혁의 대상이었고 폐지되었으니 규제개혁의 성과로 분류되었다는 사실만을 알려 줄 뿐이다.
커피 한 잔을 들고 옥상공원에 올라간다. 풀이 바람에 흔들린다. 빨갛고 노란 꽃들이 가지런히 피어 있다.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올려보니 하늘이 높다. 가을이다. 나도몰래 시선이 먼 곳으로 향한다. 건물과 건물을 지나 호수와 산이 눈에 들어온다. 생각이 이리저리 흩어져 잡념과 망상이 오간다. 규제와 공익은 다른 것인가. 애초에 공익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탄생한 공익은 어떤 형식으로 인식할 수 있었을까. 전봇대 사건을 거꾸로 읽어내도 이야기가 만들어질까. 상상해 본다.
'문제가 생겼다. 생필품 품귀로 가격이 올랐다. 부자는 아무런 불편이 없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생필품이 부족했다. 기자들은 카메라를 들고 쪽방촌을 찍고, 재래식 시장 할머니 인터뷰를 따고, 아르바이트생의 힘든 삶을 리포트 한다. 부조리를 말한다. 선거가 코앞이니 정치인들이 움직인다. 호언과 장담이 겹치고 겹쳐진다. 인간의 존엄과 가족의 기본적 품격을 위한 규제가 신설된다. 생필품 구매상한제가 만들어졌다.
담당 공무원은 의원실을 찾아가 시장경제의 근간을 흔드는 것이고, 이러한 구매상한제는 다른 물품, 다른 영역에 까지 확장될 수 있다는 좋지 않은 신호를 보여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런 공익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호소했다. 설명이 계속될수록 '우리가 국민의 대표'이며, '아직까지도 현실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며 호통이 쌓였다. 호통속에서는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담당공무원은 곧바로 '현장감각 없는 공무원'이 되었다. 법령상 제한이 있다면 모두 바꾸어 줄테니 말만 하라고 한다. 보호해야할 새로운 '공익'이 규제의 형식으로 탄생했다.'
조금 정리가 된다. 공익이 규제고, 규제가 공익이다. 규제와 공익은 순환한다. 규제개혁의 핵심은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공익으로, 내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규제개혁의 대상으로 가르는 것이다. 법령의 계속성을 부인하고, 이전 법령에 대해 비난함으로써 자신의 정당성을 획득하고 법령의 단절을 추구하는 것이다. 새로운 정당성 탄생과정이다. 이것을 비난할 필요는 없다. 모든 공익은 태초에 그렇게 탄생했다. 그저 규제개혁이라는 호칭이 생겼을 뿐이다. 그러니 나도 우울해 하지 말자. 이런 적이 한 두번이었는가. 근무하는 동안 공익의 선봉이 되었다가 규제의 적폐가 되기를 반복할 것이다. 커피 한 잔이면 충분히 평소의 나로 돌아갈 수 있다.
너무 오래 나와 있었다. 종이컵을 버리고 사무실로 간다. 계단으로 빙글빙글 돌아 걸어간다. 얼마전 공문으로 내려온 규제샌드박스가 생각난다. 규제를 모래상자에 넣고 임시로 없애보란다. 여러규제를 모래상자에 넣을 수도 있다. 결정권자가 원하는 공익을 위해 여러 개의 다른 공익을 없애보는 것이다. 결정권자가 원하는 공익을 위해서 다시 그 만큼의 규제가 만들어질 것이다. 그러고보면 규제의 총량은 같은 것이 아닐까.
이름도 얼굴도 알지 못하는 나의 많은 선배들은 공익을 위해 규제를 만들어왔다. 규제로 공익을 구현했다. 한땀 한땀, 보고서 하나하나를 쌓아서 공익이라는 나름의 모래 그림을 그려왔다. 새로운 모래그림이 필요해지는 그 순간 모래그림은 단 한번의 빗자루질이면 모래더미가 된다. 그렇지만 슬퍼하지 말자. 우리는 끝없이 돌을 굴리는 시시포스처럼 다시 색모래를 쥐어들고 한땀 한땀 모래 그림을 그려야 한다. 공익을 없애고 공익을 만드는 것은 공무원의 숙명이다.
계단을 내려가며 되뇌어본다.
만다라.
만다라.
만다라.
(중국어는 잘 모르지만, 마지막 장면은 감동적이다.)
https://blog.naver.com/pyowa/222207614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