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 생태학)
목소리를 나르는 게 내 일이다. 엄청난 짜증을 업고 청사에 도착했다. 오늘만 세 번째다. 다시 선을 타고 청사에 들어서니 새로운 민원실이 나를 맞아준다. 민원실 직원들은 스펀지 내공이 있다. 모든 짜증을 무력화시킨다. 기분은 나쁜데 흠이 잡히지 않는다. 오늘도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나를 맞는다.
속는 셈치고 다시 자초지종을 줄줄 말한다. 직원은 ‘네, 네’, ‘아 그러셨어요’라며 하나마나한 감탄사만으로 응대한다. 나는 작은 불씨라도 찾은 듯 주저리주저리 이야기한다. 잠자코 듣던 직원은 무언가를 낚아챘다는 듯 응대의 감탄사가 밝아진다.
‘아, 네. 그것은 담당부서가 따로 있거든요.’
‘제가 안내 도와드릴께요. 혹시 끊어지면 이 안내번호로 다시 하세요.’
나는 뭐 대응할 틈도 없이 민원실을 떠났다. 나는 전화선을 타고 꿈틀거리며 안내받은 3층 사무실로 밀고 들어갔다. 아마 오늘도 어제와 같을 것이다. 좀 전에 돌려졌던 지방청처럼 나는 다시 돌고 돌 것이다. 이 사무실에서 저 사무실로 어슬렁거리고, 여기 담당자에서 저기 담당자로 기웃거릴 것이다. 여기저기를 미끄러져 다닐 것이다.
오늘만 몇 통째인지 모르겠다. 일을 할 수가 없다. 이런 전화 한 통이면 시간도 시간이지만, 진이 다 빠진다. 내 업무가 아니라고 민원실에 몇 번이나 얘기했는데 또 나에게 돌려졌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얘기가 없다. 벌써 많은 사무실을 돌다 왔겠지. 너무도 당연하게 짜증 섞인 목소리를 들으면 짜증이 난다. 그래서 나는 짜증이 났다. 짜증 난 목소리로 전화를 받을 순 없다. 더 큰 짜증을 만들어낼 수도 있고, 녹음을 할 수도 있고, 불친절 신고를 할 수도 있다. 짜증을 가다듬는다.
어쨌거나 다시 들어봐야 한다. ‘선생님, 무엇 때문에 전화하셨어요?’ 맥락이 없는 전화가 많다. 궁금한 것보다는 답답한 상황을 말한다. 듣는 나는 우리부서에 관련된 것이 뭐가 있나만 듣게 된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그것뿐이니까.
또 말을 자른다. 나는 얘기를 전달해야 하는데, 얘기를 끝까지 듣는 경우가 없다. 언제나 이 모양이다. 그래서 목소리를 나르는 나의 임무는 언제나 실패한다. 업무분장이야 지방청의 문제고, 민원인이 어떻게 업무분장에 맞추어 질문한단 말인가. 민원인이 궁금한 것은 해결책인데, 쟁점을 가지고 구체적으로 물어보라니 민원인이 변호사도 아니고 그게 무슨 말인가.
나도 이런저런 안내 아닌 안내를 한 후 다른 부서로 안내해 드렸다. 내가 해줄 얘기가 없었다. 우리부서 업무가 아니니 내가 하겠다고 나서기 어렵다. 과장님도 있고, 후임자도 있다. 총대매기란 나의 결기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거기다가 한 번 처리하면 민원실에서는 앞으로 우리과에 전화를 돌릴 것이 너무나 뻔하다. 길이 트였으니 업무의 관성으로 계속해서 밀고 들어올 것이다. 미뤄지는 업무라는 것이 대부분 성과는 적고 책임은 크다. 후임자의 원망을 들을 용기까지는 나에게 없다.
그렇게 나는 3층 사무실에서 튕겨났다. 나는 5층 사무실로 돌려졌고, 전화선을 타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당겨받았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친절한 인사말이 이어졌다. 담당자 출장중이란다. 다음 주에 온단다. 자기는 담당자가 아니어서 안내가 제한된단다. 언제나 이렇다. 나는 빙글빙글 돌다가 귀신처럼 부재중인 사람에게 도착한다. 언제나 그렇게 나의 임무가 종료된다. 휴가중이거나, 출장중이거나, 회의중이다. 마치 수학시간의 순서도처럼 결론에 이르지 못하고 중간에서 뱅글뱅글 돈다.
드디어 터졌다. 목소리가 커지며 짜증이 폭발했다.
‘도대체 뭐하는 거예요. 내가 전화를 몇 번이나 건 줄 알아요?’
‘언제까지 기다리기만 해야하는 거예요?’
‘어디에 전화하라고, 어떻게 하라고 안내라도 해줘야 하는 거 아녜요?’
황당하다. 왜 나에게 폭발이야. 뭐 하루이틀 일은 아니지만, 다짜고짜 폭발하는 민원인은 언제나 적응이 안 된다. 담당자가 아닌데 내가 뭐를 어떻게 알려줄 수 있단말인가. 업무를 하지 않고 있다는 답변도 쉽지 않다. 그 답변마저도 책임이 따른다. 무엇보다 나는 바쁘다. 다른 사람 민원전화에 깊이 생각할 시간이 없다. 친절하게 전화 받고 얘기 들어주는 것만 해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근데 반응이 세다. 하도 뭐라하니 뭐라도 안내해줘야겠다.
‘민원은 국민신문고에 정식으로 제출하시면 되세요.’
‘그러면 담당자가 배정되어서 기간내에 공식 답변이 나갈꺼예요.’
민원인들의 목소리는 나를 통해 전달된다. 나는 분기탱천해가는 목소리의 절실함과 풀이죽어가는 목소리의 무기력을 안다. 절실함과 무기력한 목소리의 작은 떨림을 안다. 나는 이제 온라인에게 바통을 넘기게 될 것이다. 이제 랜선을 타고 떠다니겠지. 랜선 민원도 나와 비슷한 운명이 될 것이다. 민원실에 접수되어 이 사무실에서 저 사무실로, 여기 담당자에서 저기 담당자로 배정되고 지정될 것이다. 민원해결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구체적인 답변이 도착할 것이다. 몇 번의 민원 끝에 민원은 ‘반복민원’이라는 영예로운 타이틀을 획득하고 영구결번될 것이다.
오늘도 짜증이 벤 목소리를 나른다. 친절한 목소리의 블록킹으로 나는 어느 사무실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청사를 떠돈다. 둥실둥실 떠돈다.
다 모르겠고,
전화 좀 돌리지 마.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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