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살바도르, 햄버거와 감자튀김
엘살바도르를 9일간 홀로 여행했습니다. 폰 도난으로 인해, 과테말라에서 찍은 사진들은 구형 아이패드 혹은 타인의 폰을 사용해 찍은 사진 등으로 화질이 좋지 않습니다.
가장 위험했던 나라, 엘살바도르
중미의 엘살바도르는 작은 나라이지만 존재감이 상당하다. 지난 10년간, '마라'라고 불리는 갱들로 인해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살인율을 기록했다. 이로써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나라로 악명이 자자했다. 이후, 스스로 '지구에서 가장 쿨한 독재자'라고 트위터 자기소개(bio)에 남기는 나이브 부클레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전세는 역전되었다.
이 대통령은 무려 "비트코인을 법정화폐로 지정한 장본인"이다. 비트코인 법정화폐 뉴스로 인해 엘살바도르는 전 세계에 엄청난 존재감을 드러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중2병 걸린 대통령인가, 갈 데까지 갔으니 이제 그냥 막가자는 건가 등 회의 어린 시선을 많이 보냈지만 말이다.
우리가 보기엔 그저 철없는 대통령의 행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 대통령은 지금 중미에서 가장 존경받고 있다. 오죽하면 중미 인근 국가에서 "포스트 부클레"를 표방하며 선거가 진행되고 있을까.
과테말라에서 하루 4시간씩 나와 대화를 한 스페인어 선생님이 어느 날 신문을 가지고 오더니 요새 과테말라 대통령 선거철이라며 정치권 이슈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자고 제안했다.(*2023년 7월 기준, 현재 대선은 종료) 그러다가 자연스레 나이브 부클레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과테말라를 포함해 중미의 대부분 국가가 "우리도 엘살바도르처럼!"이라고 외치게 만든, 훌륭한 대통령이란 찬양으로 이어졌다.
나이브 부클레 대통령이 국내외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데에는 비트코인 때문이 아니라 다름 아닌 '갱 소탕 작전'이다. 엘살바도르를 위험하게 만든 것은 갱들이었다. 쉽게 풀자면 여러 조폭들이 나라를 무법지대로 만들었다고 보면 된다. 이들은 무고한 시민들의 집을 빼앗고, 이유 없이 폭력과 살인을 일삼았다. 조금이라도 값진 물건을 가진 사람이 보인다면 그냥 빼앗았다.
여행하면서 만났던 엘살바도르계 미국인 여자는 "10년 전엔 나이키나 아디다스 로고가 박힌 가방만 들고 다녀도 그저 빼앗겼다"라고 언급했다. 시민들은 밤이 되면 밖을 거의 나가지 못했고, 이 갱들이 각종 상권 등을 '관리'한다는 명목으로 각종 금품 갈취에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그대로 당해야만 했다.
나이브 부클레는 당선이 되자마자 비상사태를 선언하며 갱들을 무조건 잡아넣었다. 각종 범죄자, 갱 등을 다 집어넣고 보니 감옥이 부족해질 정도였다. 그는 "갱들에게 인권 따윈 없다"는 과격한 방식으로 접근해 "세상에서 가장 가혹한 감옥"을 만들었다. 물론 무고한 사람들도 잡혀 들어가거나 감옥 인권 문제 등으로 인권침해논란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지만, 그전에 엘살바도르 국가 청소를 제대로 해 이제 살만한 나라로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으며 90%가 넘는 지지율을 보이고 있다.
계획에 없던 엘살바도르에 간 이유
원래는 과테말라에 1개월 정도 머문 후에 비행기를 타고 코스타리카, 콜롬비아 등에 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멕시코에서 한 오스트리아 여자 여행자를 만났는데 이 친구가 파나마부터 시작해 엘살바도르까지 중미를 쭉 거쳐 왔다는 것이다. 위험하지 않냐는 나의 질문에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오히려 요새 가장 안전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엘살바도르에서 순박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며 자기 인생여행지 중 하나였다고 찬양했다.
이후 만난 2~3명의 여행자도 비슷한 말을 했다. 모두 엘살바도르를 사랑했고, 나에게 추천했다. 어차피 지금 모든 갱, 나쁜 사람들은 다 정부가 잡아들인 상태라 오히려 중미에서 가장 안전한 국가가 되었다. 그럼 이 기회를 최대한 활용해 방문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그래서 과테말라 하숙 생활이 끝나고 나는 과테말라-엘살바도르 국경을 넘기로 다짐했다.
20분 동안 식은땀 흘리며 찾아간 숙소
목표는 해지기 전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멕시코나 중미 어느 도시를 가나 처음 도착할 땐 무조건 해지기 전에 도착하는 것이 좋다. 어둠이 찾아오면, 종종 수상한 분위기로 돌변하는 곳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통 정체 문제 등으로 인해 엘살바도르 첫 목표 도시, 산타아나에 도착하니 해는 이미 저문 상태였다. 버스 하차 지점에서 숙소까지는 걸어서 약 20분 거리였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최대한 폰을 꺼내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숙소를 찾아갔다. 어둠 속의 거리에 인적이 드문 골목들을 지나치는데 분위기가 스산했다. 차라리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는데 왜 거리에 사람들이 없는 걸까. 거리에 사람이 너무 없을 경우엔 너무 없어도 무섭지만, 갑자기 한 두 사람이 튀어나와도 무섭다.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아직 일곱 시도 안 됐는데 거리에 사람이 없다는 건 여기가 위험한 구역이란 뜻일까? 안 그래도 큰 배낭, 작은 배낭을 앞뒤로 멘 상태에 누가 봐도 외국인인 나는, 만약 누군가의 눈에 띄면 가장 큰 타깃이 될 게 뻔하다. 예약해 둔 에어비앤비 숙소를 찾아가는데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좁은 인도를 두리번거리며 걷는데 한 여자가 "호텔 찾느냐"라고 나에게 다가왔다.
그냥 숙소 찾는다고 하니까 "아 이 근처에 호텔 하나 있는데 거기 가나 보네"하면서 나에게 길을 안내해 주었다.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은 내가 가려는 방향과 반대 방향이었다. 내가 호텔이 아닌, 일반 에어비앤비 가정집을 찾는다고 하니 그녀는 의아한 표정으로 "이쪽으로 내려간다고? 저긴 아무것도 없는데" 하고 갸우뚱했다. 그러면서, "일단 이 시간엔 이 거리를 혼자 걷지 않는 걸 추천해"라고 조언을 해주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더욱 무서워졌다. 위험한 곳이냐라고 되물으니 그녀는 애매한 표정을 짓더니 "무슨 일이 일어날진 모르는 일이니까" 하며 나보고 조심하라며 신신당부하며 자신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그녀와 헤어지고 나서 다행히 5분 만에 나는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분명 주소는 맞는데, 숙소 표시와 초인종도 보이지 않고 창살만 두껍게 나있어서 오히려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문을 쾅쾅 두들기니, 그제야 호스트가 문을 열어주었다. 내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상태에서 "오는 길이 정말 무서웠다"라고 말하니 호스트는 "이 지역은 안전해서 괜찮다"라며 오히려 안심시켜 주었다.
현지인들마다 지역에 대한 안전 감도가 다른 건가. 그저, 나는 숙소에 무사히 도착했음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오늘 아침만 먹고 하루종일 국경 이동하느라 아무것도 먹지 않은 나는, 그제야 긴장이 풀리며 배가 고파졌다. 시간은 오후 8시. 호스트에게 혹시 근처에 요깃거리 할 만한 장소 같은 게 있냐고 물으니 바로 맞은편에 햄버거집이 있다고 추천해 줬다. 엘살바도르에 처음 도착해 햄버거로 첫 끼를 먹고 싶진 않았지만,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더 늦어지기 전에 방에 가방을 내려다 놓고, 숙소 바로 맞은편에 있는 버거집을 향했다.
학창 시절을 떠올리게 만든 햄버거
식당은 일반 가정집을 개조한 형태로 내부는 주방 전용으로 쓰고, 바깥에 테이블을 4개 정도 차린 곳이었다.
손님이 없고 주인처럼 보이는 할머니가 앉아있길래 나도 모르게 쭈볏쭈볏 거리며 "식사되나요?"라고 물으니 할머니는 안쪽 주방에 있던 여자를 불렀다. 나에게 메뉴를 가져다주었는데 햄버거 3종류, 토르타 (바게트빵 샌드위치에 가깝다) 3종류로 메뉴는 간단했다.
확실히 엘살바도르는 달러를 쓰니 가격을 한눈에 파악하긴 쉬웠다. 나는 2.35달러짜리 기본 클래식 버거에 감자튀김과 음료를 추가했다. 소수점 두 자리까지 표시된 가격 표시가 영 어색했다. 아무래도 US달러를 쓰고, 현지 물가에 맞추느라 1센트, 5센트, 10센트 동전을 많이 쓴다.
10분 정도 기다리니 테이블엔 케첩과 그린살사소스, 피클류가 차려졌고 빨간 접시에 내가 주문한 버거와 감자튀김이 담겨 나왔다. 햄버거는 가게에서 산 듯한 참깨 번에 소고기, 토마토, 양상추, 치즈 등이 들어가 있었다. 문제는 비비큐 소스와 케첩 중간 형태로 보이는 소스에 이 모든 재료가 잔뜩 절여 나온다는 것이다. 토마토와 양상추 등마저 흐물흐물해질 정도로 소스 범벅인 버거는 일단 내 취향과는 상당히 멀었다. 탕수육 부먹파인 내가 봐도 이건, 조금 아니다 싶었을 정도로. 반면, 감자튀김은 갓 만들어 신선했다.
그래도 이 시간에 식사를 할 수 있는 게 어디인가. 감지덕지하고 버거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의외로 이 버거 맛은 익숙했다. 종잇장처럼 얇은 소고기 패티와 치즈 맛을 다 가릴 정도로 소스 맛이 강했는데 학창 시절에 먹은 매점 버거가 떠올랐다. 중학생 때 매점에서 전자레인지에 돌려 먹었던 그 버거 말이다. 한때 "닭대가리 버거"란 소문이 돌았지만 배고픈 중학생들에겐 그런 소문 따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출처 불분명한 고기 패티에 케첩 소스에 잔뜩 버무린 양배추가 다였지만 그 시절엔 그걸 참 맛있게 먹었더랬다.
나름 어른이 되면서 소스범벅인 음식을 잘 안 먹게 되었지만, 오랜만에 초등학생 입맛스러운 버거를 먹으니 꽤 나쁘지 않았다. 또 하나 마음에 들었던 건 감자튀김 찍어먹으라고 케첩과 마요네즈 둘 다 내어 주셨다는 것이다. 감자튀김-마요네즈 파로서 여간 반가운 게 아니었다. 내가 케첩은 거의 손에 대지 않고 마요네즈에 감자튀김을 계속 찍어먹자, 주인아주머니는 마요네즈를 한껏 더 담아 나에게 가져다주셨다. 결국 난 감자튀김과 버거, 피클까지 깨끗하게 비웠다.
햄버거와 감자튀김으로, 오늘 과테말라에서 엘살바도르까지의 여독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버거의 첫인상은 별로였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엘살바도르의 첫 끼 식사로 나쁘지 않았다. 이후 다른 곳에서도 엘살바도르 음식을 먹으면서 깨달은 점은, 이 나라에선 '소스 범벅'이 국룰이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