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테말라 아카테낭고 화산 트레킹과 저녁 식사
날씨가 맑기만을 기다린 이유
과테말라 안티구아에 오면 여행자들은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 아카테낭고 화산에 오르는 자, 오르지 않는 자. 아카테낭고 화산의 해발고도는 3976M. 정상 근처에 각각 화산 트레킹 여행사들이 마련한 베이스캠프에 도달하면 저 멀리 활화산 푸에고(Fuego)의 실시간 화산 폭발 및 마그마 분출 모습까지 관찰할 수 있다. 아카테낭고 화산은 휴화산이기 때문에, 엄밀히 따지자면 아카테낭고 화산을 오르는 이유는 맹렬하게 활동하고 있는 활화산 푸에고를 먼발치에서 관찰하기 위함이다.
과테말라 아카테낭고 화산 트레킹은 1박 2일 일정으로 강행되며, 각자 먹을 물 4L, 식량 등을 담아 배낭을 메고 올라간다. 다행인 것은 텐트나 침낭은 이미 베이스캠프에 마련되어 있기 때문에 배낭 무게는 5kg 내외로 그리 무겁지 않은 점이라는 것이다. 4000M에 가까운 해발고도로 자칫 고산병이 올 수도 있으며 계속해서 오르막길의 연속이기 때문에 결코 난이도가 쉽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안티구아에 한 달 머무르면서 나는 호시탐탐 날씨가 좋기만을 기다렸다. 내가 안티구아에 있었던 시기는 우기에 가까웠기 때문에 힘들게 등산한 후도 기대했던 풍경 대신 먹구름만 잔뜩 볼 수 있는 불운이 닥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실제로, 안티구아에 도착한 첫날, 나는 아카테낭고 트레킹을 막 마치고 돌아온 한 외국인 여행자에게 "힘들게 정상에 올라갔는데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라는 불평을 들었던 터라, 계속 아카테낭고 트레킹 일정을 계속해서 뒤로 미뤘다.
아카테낭고 화산 베이스캠프에 제일 먼저 도착하다
아카테낭고 화산 트레킹은 반드시 전문 가이드와 함께 올라야 한다. 안티구아엔 여러 화산 트레킹 투어 에이전시가 있는데 1박 2일 가이드 포함, 3~4끼 식사, 베이스캠프 숙박 등을 포함해 최소 5만 원부터 시작한다. 물론 너무 저렴한 모 업체 투어는 그만큼 베이스캠프 환경과 식사 퀄리티가 열악하기 때문에 추천하지 않는다는 후기가 가득하다. 여러 트레킹 업체를 탐색하다가, 가장 무난하고 평이 좋은 업체를 선정했다.
우리 팀은 미국, 프랑스, 멕시코, 콜롬비아, 코스타리카, 네덜란드 등 다양한 국적들의 여행자들로 구성되어 총 16명이었다. 여기에 가이드가 무려 3명이 붙는데, 각자 맨 앞, 중간, 맨 뒤를 맡으며 한 명의 낙오 없이 트레킹을 할 수 있도록 돕는다. 아침 일찍 픽업 차량을 타고 산 초입에 위치한 트레킹 업체 건물에 도착했을 때까진 다들 잠이 덜 깨 서먹서먹한 분위기였지만, 가이드들의 파이팅 넘치는 인트로 설명과 함께 각자 배낭에 짊어지고 갈 물품들을 배급받고 오전 10시 넘은 후에야 우린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오르막길의 연속이었다. 그래도, 난이도가 그리 어렵진 않았다. 다만, 16명이나 되는 팀원이다 보니 자연스레 뒤처지는 인원도 생겼다. 다행히 나는 체력만큼은 자신 있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선두 그룹을 유지했다. 한 2시간 정도 오른 후 우린 첫 번째 점심 도시락을 열었다.
커다란 닭다리 구이와 야채, 밥 도시락과 함께 바나나, 그래놀라, 주스까지 등산하면서 체력 떨어지지 않게 꽤 넉넉한 식량이 들어가 있었다. 도시락 맛은 기대를 전혀 하지 않았던 터라 오히려 맛있게 먹었다. 닭다리도 딱 적당히 불향이 베여있는 상태로 잘 구워져 있었고 밥과 구운 야채의 슴슴함이랑 같이 곁들이기 좋았다. 약 20분 정도, 식사를 하면서 통성명을 하기 시작했다. 유럽에서 온 친구들이 대다수였는데 그중 호스텔에서 만나 같이 왔다는 독일인 남자, 멕시코 여자, 미국인 남자 무리랑 유쾌하게 농담으로 티키타카 하면서 친해졌다.
베이스캠프에 오르기까지도 서로 으쌰으쌰 하며 뒤처지는 사람이 있으면 초콜릿이나 간식을 손에 쥐어줄 정도로 나이스했는데 그 기세로 아카테낭고 베이스캠프에 예정 시간보다 훨씬 일찍 도착했다. 한라산 2배 되는 높이를, 오전 10시 반쯤 출발해 오후 3시에 도착했으니 나름 선방한 셈이다.
선두 그룹에서도 가이드랑 스페인어로 대화하면서 제일 먼저 도착한 나는 꽤 의기양양해져 있었다. 누가 아카테낭고 화산 트레킹 어렵다고 했는데, 이 정도면 꽤 할만할걸. 내심 생각했다.
활화산 푸에고에서 매운맛을 보다
아쉽게도 우리가 베이스캠프에 도착했을 땐 구름이 가득해 활화산 푸에고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여기까지 왔는데 화산 풍경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다니. 높은 해발고도로 겨울 옷 파카부터 목도리, 모자까지 꽁꽁 껴입었는데도 추워 교대로 텐트에 들어가 누워있다가 밖에서 누군가가 "푸에고다!" 하면 다들 벌떡 튀어나가 그 모습을 구경하러 뛰어가곤 했다.
구름이 잔뜩 끼어 푸에고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우린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활화산 푸에고 등산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보통 아카테낭고 화산 트레킹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여기 베이스캠프에서 저녁 먹고 숙박하고 다음날 화산한다. 하지만, 인당 3만 원 정도 추가 지불하면 여기에서 푸에고 활화산을 등산할 수 있는데 이게 극악의 난이도인 데다가 야간 산행을 해야 하기 때문에 대부분 '등산 중급자 이상에게만 권하는 옵션'사항이다.
문제는 베이스캠프에서 푸에고 활화산까지 가는 길이 그냥 추가로 더 오르는 것이 아닌, 아예 산을 다시 한번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푸에고 활화산은 3763M. 같은 산을 오르는 게 아니라 서로 다른 산을 오르는 셈인데 한라산 2배 되는 높이 되는 산을 하루 만에 2번 왕복하는 셈이다. 게다가 푸에고 활화산 가는 길은 아카테낭고 화산 트레킹 길과 다르게, 길이 잘 닦여 있지 않다. 거의 산의 경사를 그대로 쭉 내려서 걸어가는 방식인데 가이드 없이 했다간 바로 조난각일 정도로 아찔하다.
원래 푸에고 활화산에 갈 생각이 없었다. 극악의 난이도로 힘들게 도착해도 구름이 잔뜩 끼어 화산 폭발하는 모습을 볼 수 없을 가능성이 더 컸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카테낭고 트레킹하면서 친해진 친구들의 으쌰으쌰 함에 휩쓸려 결국 푸에고 활화산 추가 등정대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해가 지고 오후 6시 정도 되었을 때 우린 슬슬 출발 준비를 했다. 저녁은 먹지 않은 상태. 푸에고에 갔다 오면 늦은 저녁을 먹을 계획이라길래 그때까지만 해도 난 한 3시간이면 다녀올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큰 오산이었다. 오후 12시쯤 점심을 먹은 후 아무것도 먹지 않은 빈 속에서 푸에고 화산으로 향했다.
칠흑같이 어둠에 모두 헤드랜턴을 달았다. 나는 랜턴을 어느 시점에서 잃어버려 결국 앞 뒤 동료들의 랜턴 불빛에 의존해야 했다. 야간 산행 경험은 그렇게 많이 없는데. 게다가 이 산행은 내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등산 경험이 될지도 모른다라는 불안감이 계속해서 엄습했다.
가이드는 시작부터 뛰기 시작했다. 낮에 올라왔던 길들을 거의 경사로를 가로질러 미끄러지듯 내려가는데 시작부터 꽤 당황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트레일러닝하는 프랑스인 친구 2명은 가이드 페이스에 맞춰 잘 뛰는 반면, 우린 "대체 왜 뛰는 거예요" 하며 울부짖는(?) 소리를 하며 이들을 따라갔다. 그나마 내려가는 것은 괜찮았다. 대충 뛰어서 내려가는 법을 터득한 후 난 이번에도 꽤 앞장서서 내려갔다. 총 10명이었는데 그중 4명이 약간 뒤처졌다. 2명의 가이드는 이대로는 너무 늦어진다며 속도가 느린 그룹은 뒤에 따라오는 가이드에 맡기고 계속해서 빠른 걸음으로 앞장섰다.
끊임없이 내려가더니 어느덧, 평지로 내려왔다. 이때까지는 할만하다고 생각했다. 등산할 때 내려가는 것을 더 수월하게 잘하는 편이기도 하고. 문제는 아까 힘들게 내려온 구간을 나중에 돌아갈 때 계속해서 올라가야 한다는 것과, 눈앞에 있는 푸에고 화산을 빠르게 다시 올라갔다 내려와야 한다는 것이다.
숨을 잠시 돌리고 이번엔 계속해서 올라야 했다. 나무 등 섭생이 풍부했던 아카테낭고 화산과 달리 푸에고 화산은 활화산이라 그런지 검은 돌들이 잔뜩 깔리고 외부 바람을 막아주는 나무와 식물들이 없었다. 높은 고도로 차갑게 불어오는 바람을 온몸 그대로 맞으며 가파른 경사를 계속 올라야 했다. 체력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오른쪽 종아리 근육이 굳는 느낌이 실시간으로 들었다. 허벅지엔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난 선발 그룹에서 점점 뒤처지며 다음 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절망스러웠다. 의지의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다리와 허벅지 근육에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는 상황은 처음 겪어 나조차도 당황스러웠다.
네덜란드 친구는 내 입에 초콜릿과 견과류를 털어 주었다. 독일인 친구는 내 가방을 빼앗아 맸다. 미국인 친구는 나를 계속 뒤에서 밀어주며 "할 수 있다"라고 속삭였다. 민폐 끼치기 싫어 그냥 버리고 가면 내가 알아서 가겠다고 했음에도 이들은 "우린 팀이니까 우리가 니 페이스에 맞춰줄게"하며 나를 한사코 끌고 갔다.
결국 올라간 푸에고 활화산의 첫 5분은 절망스러웠다. 먹구름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체 지금 우리가 어디에 서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시야가 차단됐다. 게다가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아야 하는 상황에서 온몸이 덜덜 떨려왔다. 아이폰마저 낮은 온도로 꺼진 상황이다. 이럴 순 없어하면서 우린 오기로 10분, 15분을 기다렸다. 마침내 구름이 살짝 걷혔고 눈앞에 커다란 소리와 함께 분출하는 화산이 나타났다. 세 번째 분출했을 땐 주황빛 마그마가 흘러나왔다. 꺼진 아이폰이 야속했을 정도로 멋진 광경이었다.
밤 11시 반, 산행을 마치고 즐긴 늦은 저녁 식사
정상에서 다시 뛰면서 내려갔다. 그나마 내려가는 거라 이번엔 다시 나도 기운을 차렸다. 내리막길에서 오르막길로 교차하는 지점에서, 가이드는 배낭에서 종이컵을 꺼내 우리에게 나눠주었다. 과테말라의 소주라고 할 수 있는 30도가 넘는 께짤떼낭고 술과 간단한 스낵이었다. 마지막 고비인 오르막길 (베이스캠프에서 미친 질주로 내려왔던 그 길)을 무사히 오를 수 있도록 기원하며 건배했다.
내려올 땐 쉬웠지만 올라가자니 고역이었다. 초입에서 기운을 차렸던 나는 다시 한번 뒤쳐지기 시작했고 욱신 거리는 허벅지를 부여잡고 정말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친구들은 계속해서 나를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어주면서 속도를 맞춰주었다. 나름 체력 좋은 편이라고 자부했다가 짐짝이 된 기분이었다.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겨우 겨우 도착한 베이스캠프에선 캠프를 지키고 있던 남은 가이드 1명이 솥에 불을 지피고 있었다.
시간은 이미 밤 11시 반. 그는, 미리 조리한 볶음면과 매쉬드 포테이토, 매쉬드 빈(프리올레)을 접시 한가득 담아 주었고 갓 만든 코코아를 종이컵에 담아 건네주었다. 초콜릿과 견과류만 먹고 힘겹게 다녀온 푸에고 활화산을 마치고 받아 든 따뜻한 음식은, 비주얼상은 그리 특별하진 않았지만 그 순간만큼은 마비된 종아리 근육마저 풀어주었다. 식사를 하면서 우리는 이야기를 많이 나누진 않았다. 다만, 우리는 새벽 4시에 일출을 보기 위해 일어나야 한다는 사실과 우리에게 보장된 수면 시간은 4시간밖에 없다는 사실에 절망할 뿐이었다.
일출 산행
아카테낭고 화산 베이스캠프에서 정상까진 약 40분 거리이다. 다만 경사가 70도 이상으로 가파르기 때문에 아침 일출을 보려면 새벽 4시에 일어나 눈곱만 때고 올라야 한다. 여전히 허벅지와 종아리 근육이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우린 힘겹게 눈을 떴고, 각자 화장실만 다녀온 뒤 그 상태로 어둠 속 산행을 진행했다. 나름 어제 푸에고 활화산까지 다녀왔다고, 이번 일출산행은 꽤 할만했다. 물론 마지막에 힘이 빠져 다소 뒤처졌지만, 정상에서 바라본 뷰는 숨 막히게 아름다웠다.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하게 푸에고 활화산이 보였고, 우린 실시간으로 폭발하는 화산과 저 멀리 솟아오르는 태양을 보며 어제 못 본 뷰를 오늘 다 푼다는 듯, 마음껏 만끽했다. 내 인생 첫 4000M 가까이 되는 화산 위에서 바라보는 일출은 피곤함을 날려버릴 정도로 내가 살면서 본 일출 중 단연 으뜸이었다.
비록 전날, 체력을 과신하며 푸에고 활화산까지 가는 객기를 부렸지만, 스스로 체력의 한계를 테스트하고 짧은 쪽잠을 잔 후 일출 산행까지 해낸 나를 보며 괜히 대견스러워졌다. 아카테낭고 화산을 하산한 이후, 한동안 만나는 친구들마다 "그 힘들다는 푸에고 화산까지 다녀왔다"는 것을 넌지시 자랑하고 다녔다. 힘들지 않았냐는 질문에 "죽을 뻔했어... 그런데 너무 잘한 거 같아"라며 생생한 모험담을 들려주며 그들에게 두려움과 함께 동기부여를 동시에 심어주는 것을 잊지 않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