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하까, 깔도(Caldo)
와하까 고기 시장
어느 도시를 방문하나 시장은 꼭 방문하는데, 와하까(Oaxaca) 역시 예외는 아니다. 와하까의 대표 시장인 11월 20일 시장 (20 De Noviembre)인데, 이는 멕시코 혁명 기념일에서 따왔다. 1910년 11월 20일은 독재자 포르피리오 디아스(Porfirio Díaz)의 장기 집권에 반대해 일어난 날로 멕시코에선 이 날을 혁명 기념일로 지정한다. 와하까뿐 아니라 멕시코 전역에는 이 날짜를 기념하는 거리, 공원, 시장 등 이름으로 많이 사용된다.
와하까의 여러 시장 중 11월 20일 시장이 유독 유명한 이유는 고기 시장이란 별칭 때문이다. 이 시장 내엔 '고기 BBQ 구역 (Pasillos de las Carnes Asadas)'이 있다. 소고기부터 돼지고기, 양고기 등 다양한 종류의 신선한 고기들이 있는데, 손님이 고기를 선택하면 그 고기를 즉시 현장에서 BBQ 해준다. 이 섹션에 들어서면 고기 굽는 연기들이 자욱하다.
와하까에 오면 꼭 한번 이 시장에서 고기 BBQ를 맛보라고들 하지만, 나는 고기 BBQ에 유독 감흥이 없는 편이다. 무엇보다, 신선한 고기를 현장에서 구매해 즉석에서 구워 먹는 시스템은 우리나라의 흔한 정육식당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물론, 가격은 한국보다 저렴하지만 이곳 고기 시장에서 BBQ를 주문하면 양이 많아 혼자 감당할 수가 없다.
오히려, 난 이 시장의 다른 섹션으로 가 현지인들이 먹는 진짜 서민 로컬 음식을 맛보기로 했다.
멕시코식 국밥, 깔도(Caldo)
한국 사람이 중남미 여행을 할 때, 종종 국물 요리가 당기는 경우가 많다. 그 경우 Caldo를 검색해서 주변 식당을 찾아보자. 깔도(Caldo)는 멕시코식 국밥으로 고깃 국물에 고기와 멕시코식 토핑 등을 넣어 먹는 음식인데 밥까지 말아져 있기 때문에, 한국의 돼지국밥이 절로 연상되는 음식이다.
시장에서 깔도로 유명한 점포로 찾아가 이곳의 시그니처인 깔도 스페셜 (Caldo Especial " La abuelita")를 주문했다. 닭고기와 치차론(돼지껍데기 튀김), 치즈, 아보카도, 토마토, 밥. 이 재료를 열거만 해도 우리에겐 기괴한 조합으로 다가온다. 대체 무슨 맛일까? 국물에 돼지껍데기 튀김을 넣는다고? 거기에 아보카도와 치즈?
이미 멕시코 여행만 이미 두 달 넘은 상태로 나름 멕시코 음식에 짬밥이 있었던 나에게도 이 음식은 생소했다. 국밥집답게 음식도 빠르게 나왔는데, 맑은 국물에 치차론(돼지껍데기 튀김)과 큼직하게 잘린 와하까 치즈, 아보카도, 토마토가 들어가 있다.
일단 국물만 떠먹어봤을 때 고깃 국물맛이 난다. 국물만 맛보면 담백한 닭고기 국물인데 여기에 치차론을 함께 떠서 먹으면 짭짜름한 치차론으로 간이 되어 절묘하게 맛이 바뀐다. 와하까 치즈와 아보카도는 고깃국물에 익혀져, 재료 본연의 맛보다는 식감으로 존재감을 나타낸다. 국물 밑에는 마치 토렴한 것처럼 흰쌀밥이 가득 있다. 여기에, 인상 좋은 주인아주머니는 내 앞에 천에 감싼 거대한 또르띠야를 무심히 놓고 간다. 국밥 요리를 시켰는데도 또르띠야라니. 멕시코 사람들의 또르띠야 사랑은, 한국 사람들의 쌀밥 사랑 못지않다.
스푼으로 국물과 치차론을 떠먹다가 틈틈이 또르띠야에 건더기를 넣고, 테이블에 미리 세팅되어 있던 양파 오이 피클류를 올려서 먹는다. 한 가지 음식을 시켰는데, 두 가지 방식으로 취향껏 즐길 수 있어 재밌다.
"신의 음료"라고 불렸던 전통 음료
식사를 하고 나오는데, 시장 입구에서 한 아주머니가 커다란 대야 같은 곳에 정체불명의 음료를 담아 팔고 있었다. 마침 목이 말랐던 참이어서 한 잔 달라고 요청하고 이름을 물었다.
테하테(Tejate)는 와하까 지역의 전통 음료로 옥수수 가루와 발효된 카카오(cacaoatl)를 주재료로 사용한다. 스페인 사람들이 이곳을 정복하기 전까지 와하까는 사포텍 문명권이었다. 사포텍 지역은 멕시코 전역에서도 '카카오'로 유명한 곳이었는데 고대 문명 시대부터 이 카카오가 주요 식재료였다. 사포텍 문명뿐 아니라 마야문명, 아즈텍 문명에서도 카카오를 활용한 음료가 "신의 음료수"라고 불리며 귀족들만 마실 수 있는 특별한 음료였다고 한다.
신의 음료라고 불렸던 테하테가 지금은 시장에서 5백 원 주면 한 컵 가득 마실 수 있다는 게 흥미로웠다. 아주머니는 대야에 담긴 초콜릿색 음료를 컵에 담고 그 위에 하얀색의 몽글몽글한 토핑 같은 것을 잔뜩 올려주었다. 얼핏 보면 몽글몽글한 두부 같기도 한 이 것의 정체는 카카오 꽃(Rosita)을 넣고 테하테를 만들면서 생기는 단단한 거품인데, 이것만 따로 맛보면 카카오 꽃향이 은은하게 느껴진다.
여전히 이때 마셨던 이 음료의 맛을 표현하는데 한계가 있었는데 그나마 가장 비슷한 식감과 맛을 찾으라면 한국의 걸쭉한 미숫가루와 닮았다. 여기에 마지 비지처럼 보이는 카카오꽃 거품을 함께 마시는데, 멕시코 음료치고 전혀 단 맛이 없다. 멕시코에서 음료수를 마시면서 건강한 맛이라고 느낀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와하까의 뜨거운 햇빛 아래, 물과 콜라를 아무리 마셔도 금세 갈증이 나기 마련인데 차갑게 만든 이 테하테를 마시니, 살짝 지친 마음에 에너지가 돌며 천연 카페인 음료의 역할을 톡톡히 한다. 와하까를 여행한다면, 이 음료를 파는 노점을 그냥 지나치지 말고 음료를 주문해서 마셔보자. 특히 느끼한 고기류와 음식을 먹고 나서 이만한 입가심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