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에르토 에스콘디도 , 멕시코
멕시코 사람들은 바다 보고 싶을 때 어디로 갈까? 신혼여행지로 인기 있는 칸쿤은 잔잔한 물결과 평화롭고 고급스러운 휴양지의 이미지가 더욱 강하다. 멕시코 시티에서 만난, 멕시코 친구들은 내가 바다를 좋아하고 서핑도 할 수 있다고 하니 "푸에르토 에스콘디도"를 꼭 가봐라고 입을 모아 말을 했다.
푸에르토 에스콘디도는 멕시코 남부 와하까 주에 속해있지만, 버스로 무려 12시간 굽이굽이 넘어가야 겨우 도달할 수 있는, "숨겨진 항구(puerto escondido)"란 이름값을 톡톡히 하는 곳이다. 멕시코 저명한 영화감독인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대표작품인 <이 투 마마 y tu mama, tambien> 속 주인공들은 술 김에 언급된 "아무도 모르는 환상적인 해변"을 즉흥적으로 떠나는 로드트립 무비이다.
영화 속에선 이 들이 찾는 해변의 이름이 "하늘의 입(Boca del cielo)"이란 가상의 해변이었지만, 실제로 푸에르토 에스콘디도 등지에서 촬영했다. 그만큼 푸에르토 에스콘디도는 멕시코 사람들의 머릿속에 미지의 환상적인 해변이란 이미지가 뿌리 깊게 자리 잡았다.
인생에서 가장 태양이 가까웠던 순간
4월의 멕시코 남부는 태양이 유독 크고 뜨겁다. 살면서 태양의 열기를 가까이서 느껴본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다. 와하까에서 심야 버스를 11 시간 타고 아침 9시 조금 넘어서 숙소에 도착했는데 벌써부터 심상치 않은 열기가 느껴진다. 습하진 않은 대신, 한국 여름 태양의 2~3배 열기로 사람을 숨 막히게 한다. 두껍게 바른 선크림을 뚫고 들어오는 자외선이 피부를 찌르듯이 느껴지며 실시간으로 피부가 타는 게 체감이 될 정도이다. 이후 1년 이상 중남미를 여행하며, 가장 뜨거운 태양을 느꼈던 곳이 바로 이 푸에르토 에스콘디도였다.
이번에 예약한 에어비앤비는 꽤 큰 세탁소를 운영하는 주인이 일꾼들에게 으레 주는 남는 쪽방을, 종종 부업차원에서 외국인 여행객에게 빌려주는 듯했다. 세탁소가 운영해서 그런지, 방이 낡았지만 침대 시트와 이불은 뽀송뽀송하다. 에어컨이 없는 대신, 천장 선풍기에 의존해야 했는데 그나마 태양이 없는 밤에는 거대한 선풍기로 인해 그리 불편함 없이 잘 수 있었다. 에어비앤비 숙소로 향하는 대문이랄 게 없어서, 매번 이웃 신발가게를 통해 지나가야 했고 그때마다 신발가게 주인아주머니에게 "올라(hola)"하며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인심 좋은 주인장 덕분에 아침 일찍 방에 체크인해서 한 3시간 눈을 붙였다. 가장 더운 오후 12시에 허기가 져서 바깥에 타코 먹으러 갔다가 뜨거운 열기에 화들짝 놀라 타코만 먹고 순식간에 다시 숙소로 돌아와야 했다. 푸에르토 에스콘디도 11시~3시엔 마치 모두가 낮잠을 즐기는 양, 거리는 조용했다. 어느 가게를 가도 주인들은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토록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선 일하고 싶은 욕구가 샘솟는다 할 지라도 금방 타버리기 십상이다.
멕시코 가족여행에 낀 이방인
멕시코 시티에서 알게 된 한 멕시코 친구 M이 있다. 40대 소소한 가족 사업을 하는 당찬 여성 M은, 한국 드라마를 보고 한글을 조금씩 공부하다가 나를 알게 됐다. 멕시코 시티에서 M과 만났을 때 당시 M이 4월쯤 푸에르토 에스콘디도로 가족 여행을 갈 거다라고 언급한 적이 있는데, 그게 마침 일정이 맞아떨어졌다. 그녀는 그녀의 어머니와 아버지, 남동생, 딸까지 든든한 가장으로서 이들을 이끌고 푸에르토 에스콘디도로 날아와 이미 이틀째 푸에르토 에스콘디도에 머무르고 있었다.
M에게 푸에르토 에스콘디도에 도착했다고 왓츠앱을 보내자, 태양이 조금 가라앉고 오후 4시쯤 만나자고 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부족한 잠을 보충했다.
시장 근처에서 만난 우리는 바다로 향하기로 했다. 푸에르토 에스콘디도엔 다양한 해변이 있는데, 이 가족들 역시 별다른 계획 없이 나만큼 우당탕스럽다. 어느 해변으로 가야 하는지 몰라서, 지나가는 콜렉티보(필리핀의 지프니와 비슷한)를 잡고 무작정 바다로 가냐고 묻는다. 어느 바다를 원하냐는 현지인들의 질문에, "그냥 평화롭게 앉아서 편하게 맥주 한 잔 할 수 있는 곳"이라며 너스레를 떤다.
이 방향이 아니다란 말에 해당 콜렉티보에서 내려, 다시 반대 방향으로 가는 차로 갈아타 우여곡절 끝에 도착했다. 저 멀리 하얗고 작은 보트들이 둥둥 떠있었고 물가에선 사람들이 물장난을 치고 있다. 푸에르토 에스콘디도는 서퍼들의 성지로 불리는 만큼, 대부분 해변의 파도들이 힘차고 크기로 유명한데 이곳은 그중 가장 잔잔한 곳으로 어린아이를 데리고 온 가족 여행자들이 대부분이었다.
푸에르토 에스콘디도에서 파도가 가장 약한 해변이라지만, 그래도 온몸을 덮치는 파도가 종종 밀려온다. M의 딸은 17세로 수영을 하지 못했는데 커다란 파도가 다가올 때마다 겁에 질려 물가로 허겁지겁 도망가곤 했다. "우리 딸에게 수영 좀 가르쳐줘"라는 M의 말에, 이 물에 수영까지 가르쳐주는 것은 무리일 거 같고, 물을 무서워하지 않고 파도를 타는 방법을 알려주겠다며 M의 딸의 손을 잡고 들어가 파도가 올 때마다 타이밍 맞춰 점프를 했다.
M의 딸은 처음엔 물을 먹어가며, 내가 손을 잡고 있음에도 파도가 오며 계속 뒷걸음질 치려고 움찔거렸으나 이만한 파도를 아직 그녀가 살면서 경험해보지 못해 나온 두려움이기에, 이를 그녀가 즐길 수 있도록 나는 계속해서 카운트를 세며 점프 타이밍을 맞췄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가 이 순간을 즐기고 있는 것이 느껴졌고, 마치 딸의 두 발 자전거의 안장에서 처음 손을 떼는 순간의 뿌듯함이 밀려왔다.
해변에 앉아 미첼라다 한 잔
여행을 하면서 음식과 술, 모두 가리지 않고 먹지만 내가 유일하게 용납하지 못했던 음료가 바로 '미첼라다'였다. 커다란 잔에 맥주와 토마토 주스, 라임즙 등을 섞고, 잔에는 타진(tajin)이라고 부르는 고춧가루와 소금 등을 삥 둘러 묻혀놓는다. 잔에 테에 둘러진 이 고춧가루와 소금은 액체와 만나 단단하게 붙어 있는데 이 오묘한 음료를 마시며 치아로 살살 이 타진을 긁어먹는다.
멕시코 시티에서 약 3번 정도 미첼라다를 마셨지만, 도저히 정이 안 가는 음료 중 하나였다. 하지만, 멕시코 사람들에게 이 미첼라다는 타코만큼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이들만의 문화랄까. M의 가족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해변 파라솔 테이블에 앉아, 사람 수에 맞게 미첼라다를 주문했다. 멕시코 사람들의 인심만큼 거대한 잔에 불그스름한 미첼라다를 보니, 편견 없고 열정적인 멕시코 사람들과 참 닮은 음료란 생각이 들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폭탄주이지만, 술은 맥주만 들어가고 나머지는 토마토 주스, 라임즙 수준이니 이 정도면 비교적 건강한 폭탄주가 아닌가. 가족들이랑 어울리며 해변에서 파도를 보며 즐기기에 부담 없다. 역시 미첼라다는 혼자서 마시는 것보다 여럿이서 즐길 때가 맛의 진가를 발휘한다. 결국, 미첼라다의 맛은 현장 분위기의 맛인 것이다.
미첼라다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 글을 쓰면서 마음속에서 "아, 멕시코 해변에서 미첼라다 한 잔 하고 싶네"란 생각이 몽글몽글하게 솟아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