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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숙소에서 일하며 알게된 다양한 사랑 유형

산 크리스토발 데 라스 까사스에서 만난 사람들 02

by 노마

본 글은 앞의 글과 이어집니다. 앞의 글을 읽고 오시는 걸 추천합니다.

https://brunch.co.kr/@msk-y/239




알리제는 문제의 그 무리를 제외하고는 누구와도 잘 어울렸는데, 이 작은 공동체에 흐르는 미묘한 감정의 결들을 포착해내는 재주가 있었다. 누가 누구를 좋아하는지, 누구와 누구 사이에 어떤 기류가 흐르는지, 그녀는 마치 숙련된 기상예보관처럼 관계의 날씨를 읽어냈다. 그리고 자신만의 가설과 관찰 결과를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풀어내곤 했다.

IMG_3093.JPG 한달넘게 스태프로 지낸 멕시코 숙소

데이팅앱을 통해 만난 한 멕시코 남자와 유효기간이 정해진 연애를 하는 것도 그녀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데이팅 앱을 한번도 사용해본 적이 없던 나에게 처음으로 데이팅 앱 사용을 적극적으로 권유하며, 더블데이트를 하자며 조른 것도 그녀였다. 우리끼리 있을 때면 종종 그녀는 “그거 알아? P 게이인 거 같아”라며 흥미로운 화두를 던지곤 했다. 누군가를 비하하거나 희화화하려는 의도보단, 이 곳에 머무르는 사람들의 성적 취향에 대해 실례가 되지 않는 선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녀 덕분에 알게된, 이 작은 공동체 안에 얽힌 관계들의 복잡함이 흥미로웠다. 페이스북에서 종종 보던 “복잡한 연애”, “자유로운 연애”같은 상태 표시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이 설정하는 것인지 궁금했는데, 20~30명 남짓한 이 커뮤니티에 그 다양한 유형의 관계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다음은 우리의 커뮤니티에서 관찰된 “복잡한 연애 관계” 유형을 일부 정리한 것이다.



함께 여행하지만 커플은 아니야

#1. 7개월 동안 함께 여행하지만 커플은 아니야, 영국인 남녀 A와 J


알리제가 체크인했던 그날, 까무잡잡하고 건장한 체격을 가진 파키스탄계 영국인 A와 여리여리한 금발의 백인 영국 여자J도 함께 들어왔다. 누가봐도 커플 같았는데 각자 방을 따로 잡아서 의아했다. 보통 남녀가 함께 체크인하면 더블베드든, 트윈베드든 한 방을 쓰는 경우가 많다. 순수 친구라 하더라도, 경제적인 이유로 그렇게 하는 게 경제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은 서로 마주 보는 방에 각각 머물렀다. A는 영국 맨체스터 출신이고, J는 남쪽 어느 작은 지방 출신인데 두 사람은 같은 영국 회사에서 일을 한다. 영국 시간에 맞춰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이들은 매일 새벽 4시부터 일을 시작했다.


이들은 같은 회사에서 재택근무를 하다가 우연히 '여행에 대한 뜻'이 맞아 함께 동행을 시작했다고 했다. 동남아부터 멕시코까지, 약 8개월을 함께 여행했다. 서로 사귀는 건 아니라고 했다. 가능하면, 방은 따로 잡되, 불가피할 경우에는 합방을 하기도 한다고 했다. 이들은 커뮤니티 프로그램 참여보단 둘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을 선호했다. 매일 함께 밥을 먹고 맥주를 마시며, 누가 봐도 연인이 할 법한 행동들을 했다. 수시로 서로의 방에 드나들었고, 늦은 새벽 1시에 거실에서 소파에 나란히 누워 넷플릭스 다큐멘터리를 다정하게 보는 모습도 자주 목격되곤 했다.

90d7c61a-c609-49fe-a97c-c0597b5efd5f.JPG 매일 오후 2시 진행한 요가 세션 (글과는 관계없음)

알리제는 이들이 “육체적 관계를 맺되 진지한 관계로 발전하지 않는 친구 관계(Friends with benefits)”라고 강력히 판단했다. 다른 누군가는 “누가봐도 A가 J를 좋아하는데, J가 선을 긋는 것”이라고 추측했다. A와 J는 매주 수요일 모두가 함께 참여하는 저녁 시간을 제외하곤, 커뮤니티 이벤트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누구도 그들의 관계에 대해 확신을 내리지 못했다. 다만 뒷소문만 무성할 뿐이었다.


A와는 동네 무에타이 체육관을 함께 등록하면서 친해졌는데, 어느날 그는 나에 대한 호감을 은밀하게 드러낸 적이 있었다. 무에타이 체육관에서 숙소까지 약 20분 정도 걸어야 했는데, 황혼이 아름답게 내려앉은 마을이 유독 쓸쓸하게 느껴지던 무렵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키가 큰 A가 내 걸음 속도에 맞춰 천천히 걷다가 뜬금없이 내 손을 잡으려고 했다. 당황스러워서 반사적으로 손을 쳐버리곤, 민망해서 “아, 무예타이 방어 동작”이라고 둘러댔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빤히 바라봤다. 어색한 기류가 흘러 어찌 해야할 바를 모르던 차에 그는 나에게 남자친구가 있느냐고 물었다.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상황을 어떻게든 모면하고 싶어서, “너는 J가 있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그러자 그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J는 그저 친구야”라고 대답했다.


만약 내가 A에게 일말의 호감이 있었더라면, 어떻게 그냥 친구인데 함께 8개월 가까이 함께 다니며 종종 침대까지 공유하느냐고. 둘이 다정하게 누워있는 걸 여러 번 봤다고 구구절절하게 따져 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자칫 내가 A에게 마음은 있지만 J라는 장애물 때문에 망설인다는 오해를 살 것 같았다.


결국 거의 다 왔다는 핑계로 그 자리를 서둘러 벗어났다. 여전히 A가 그 때 진짜 의도한 바를 알 수 없었다. 혹시 내가 마음에 든다고 하면, J를 버리고 나와 함께 다닐 생각이었던 걸까? 아니면, 그저 나를 하룻밤 상대로 살짝 떠본 것이었을까. 알리제는 내 이야기를 듣더니 자신의 가설에 더욱 확신을 가지며 말했다. “거봐, A와 J는 그런 관계가 맞다니까. 육체적 관계는 있어도, 서로 의무는 가지지 않는 사이니까 A가 너한테 들이댄거지”

A와 J는 한 달 후 숙소를 체크아웃했다. 첫 날 체크인할 때 팔로우했던 그의 인스타그램을 보니, 그들은 한동안 칸쿤의 어느 숙소에서 오래 머물렀던 것 같았다. 서로의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리진 않기 때문에, 그들이 여전히 “친구”관계로 여행을 이어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들의 관계는 그들만 아는 걸로.


양성애자 남자와 연애하는 여자의 심리는 뭘까

#2. 양성애자 남자와 연애하는 네덜란드 여자 V


나와 함께 스태프로 일하는 호주 남자 N이 주말에 삼일간의 여행을 위해 근무시간 맞교환을 제안했다. 매주 월요일 아침 회의할 때 매니저 싼티가 한 주의 근무 스케줄을 확정해 공유하면, 우리는 저마다의 사정에 따라 서로의 일정을 바꿔가며 조율한다. 흔쾌히 수락하며 어디 가냐고 묻자, 멕시코-과테말라 국경 근처 호수에서 캠핑을 할 계획이라고 했다. 네덜란드 출신 여자 게스트 V와 함께 갈 거라며, 그의 얼굴에는 설렘이 묻어 있었다. 누가봐도 여자친구와의 여행을 기대하는 남자친구의 모습이었다.


V는 말수가 적었다. 다른 게스트들과 달리, 유일하게 뚜렷한 직업이 없는 여행자였다. 다른 게스트들이 노트북을 끼고 숙소 여기저기서 회의를 하거나 일에 몰두할 때, 그녀는 루프탑 테이블 위에서 무언가를 색칠하고 있거나, 책을 읽곤 했다. 때로는 해먹 옆 큰 천을 깔아 돗자리 삼아 하루 종일 그 곳에 앉아 사람들을 관찰했다. 그녀는 말수가 적었지만, 유독 N과 함께 있을 때만큼은 달랐다. 그녀의 목소리가 이렇게 경쾌할 수 있구나, 싶을 정도로 수다스러워졌다. 한번은 우연히 그녀와 단둘이 공간에 남게 된 적이 있었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나눈 대화에서, 그녀가 이미 이 곳에 다섯 달 넘게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스페인어는 거의 못 하고, 현지인 친구나 단골 가게도 없는 것을 보면, 그녀는 이 도시보다는 Co404라는 공간 자체가 주는 안정감을 사랑하는 듯했다.


V와 N은 항상 한 쌍처럼 움직였다. 서로를 여자친구, 남자친구라고 소개한 적은 없었지만, 누군가가 N이나 V를 찾을 땐 우린 으레 "V에게 연락해 봐" 혹은 "N이랑 같이 있을 거야”라고 답하며, 암묵적으로 그들을 공개연애 커플로 여겼다.


어느 저녁, 다른 여자 게스트들과 함께 가벼운 술을 마시며 "걸스 나잇(Girl's night)"을 보냈다. 이 작은 커뮤니티에서 벌어지는 사소로운 가십,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고, V와 N 이야기도 그 중 하나였다. “너희 그거 알어?” 이 방면의 소식통인 알리제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걔네 둘이 육체적인 관계를 안 갖는대. V가 그러는데, N과 절대 성관계를 해본 적이 없다는 거야” 그 두 사람이 성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사실보다, V가 알리제에게 그런 이야기를 털어놓았다는 것이 더 신기했다. 혹시, 플라토닉한 관계냐고, 아니면 정말 가까운 친구사이냐고 물으니 알리제는 아니라는 손짓을 하며, 우리의 시선을 훑고는 씨익 웃었다. “V말에 의하면, N은 바이*래(바이섹슈얼 Bisexual: 양성애자)”


바이섹슈얼. 그 단어는 미국 리얼리티쇼나 영화 등으로만 접했지, 실제로 그러한 성향을 가진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게이가 흔히 가지고 있는 쿨하고 섹시한 이미지와 달리, 바이섹슈얼은 중성적인 매력으로 남녀 모두에게 어필가할 수 있다는 건데, 크리스틴 스튜어트 수준의 멋짐과 예쁨을 다 갖춘 외모가 아니라면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N이 바이라니. 그의 이미지를 머릿속에 떠올려봤다. 키가 크고 마른 몸, 다비드 상처럼 곱슬거리는 머리카락, 초록색 눈동자, 확실히 예쁜 남자 느낌은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게이의 전형적인 모습-여성스러운 몸짓이나 목소리-는 전혀 없었기에, 당연히 평범한 이성애자 남성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생각해보니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그의 전반적인 이미지와 분위기를 고려해보면, 그가 바이란 사실은 수긍할 만했다.


N의 성적 취향이 뒷담화로 아웃팅되는 것이 적절한가 하는 조심스러움이 들었는데, 미국인 A가 맞장구쳤다. “어, 나 N이 바이인 거 진작에 알고 있었어. N이 예전에 남자친구와 사귄 적 있다고 말한 적 있거든” 이젠 V가 어떤 마음으로 N과 사귀는 것인지, 그들이 육체적인 관계를 맺지 않는 것은 V의 선택인지 미궁에 빠졌다. 하지만 아무도 V와 그 이상 깊은 이야기를 나눈 사람은 없는 듯했다. 혹은 있다 해도 그녀의 비밀을 지키고 있는 것일지도.


N은 얼마 후 스태프 일을 그만두고 글쓰기에 전념하겠다며 도시에 방을 얻어 독립을 했다. V는 여전히 도미토리에 머물면서 N의 집에 살다시피 했다. 그 정도라면 둘이 동거하는 게 합리적일 텐데, 그녀는 절대 체크아웃하지 않았다.


서로를 남자친구, 여자친구가 아니라고 부정하진 않지만, 양성애자인 남자친구와 플라토닉한 관계를 유지하는 여자. 정의를 내릴 수 없는 복잡미묘한 관계란 게 이런 것일까. 어쩌면 모든 관계는 정의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단지 이름을 붙이고 싶어 할 뿐이다. 마치 별자리에 이름을 붙이듯이. 하지만 별들은 그런 이름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그저 자신의 궤도를 돌 뿐이다.


다자연애란 단어를 처음 알려준 그녀


#3. 다자 연애를 즐기는 대만 여자 K


K는 아담한 키에, 쇼트커트 헤어스타일로 꽤 귀여운 얼굴을 가졌다. 대만 출신이지만, 캐나다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고, 대학까지 마친 뒤 타이베이에 정착했다고 했다. 타이베이에 약혼한 파트너가 있으며, 이번에 캐나다에서 열리는 친구 결혼식에 참석하는 김에 멕시코에 잠시 들렀다고 했다.


대학원 심리학을 전공한 그녀는 온라인 심리 코칭 프로그램 사업화를 준비하고 있었다. 몸은 타이베이에 있지만 주요 타겟은 미국과 캐나다로 삼을 예정이라고 했다. 그녀는 어느 날 그룹 위챗에 흥미로운 메시지를 남겼다. 인간관계 & 연애 무료 1:1 코칭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며, 관심이 있다면 링크 속 사전 설문을 작성하고 개인 위챗을 보내면 예약 가능한 시간대를 알려주겠다고 했다. 상담을 신청하더라도 딱히 이야기할 거리가 없어서, 그녀의 메시지를 한번 보고 그냥 넘겼다. 그런데 이후 단체채팅방에서 “정말 최고야, K와 이야기를 하면서 많이 울었는데,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치유가 됐어” “이번 달에 한 결정 중 가장 잘한 결정인거 같아”라며 미국인 특유의 과장스러움이 담긴 칭찬들이 공유되기 시작했다. 잊을 만하면, 누군가가 K의 상담세션을 막 받고 난 후기를 공유했다. 도대체 뭐길래 이런 반응이 나오는 걸까. 호기심으로 그녀가 보낸 사전 설문지를 열어보았다.


폴리아모리(Polyamory)란 단어를 처음 마주쳤다. Poly-는 “많은”을 뜻하는 접두사이고 amory는 사랑을 뜻하는 amor에서 파생된 단어다. 단순히 유추해보면 ‘많은 사랑’이라는 뜻인데, 정확한 의미를 찾아보니 다자연애를 가리키는 용어였다. 첫 번째 문항부터 다자연애에 관한 생각을 묻다니. 미국과 캐나다인들의 관계에 대한 오픈마인드에 새삼 감탄하며, 아마도 다양한 사랑 유형에 대한 포괄적인 설문조사려니 했다. 하지만, 설문이 심화될수록 지금 파트너는 몇 명인지, 만약 폴리아모리가 아니라면 흥미는 있는지, 동시에 두 명을 사랑하게 되었을때, 세 명이 모두 동의한다면 관계를 이어가고 싶은 의향이 있는지⋯⋯


살면서 한 번도 생각해 보지도, 이야기 해본 적도 없는 주제에 적잖이 당황했다. 결국, 설문 절반 정도를 읽어내려갔을 때야 깨달았다. 이것은 아예 폴리아모리에 관련된 상담이었던 것이다. 마치 종교처럼 폴리아모리에 대해 생각해본 적도,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포교활동을 하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스쳤다. 한국에서 길을 걷다가 “심리상담”을 미끼로 포교활동을 하는 소위 “대학원생”들을 자주 마주쳤기에 자연스레 생기는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결국 난 설문을 중단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K와의 상담을 해볼걸 그랬나 싶지만, 지극히 평범한 모노가미(Monogamy : 한 사람과 연애하고, 결혼하는 사람들)로서 단순한 호기심만으로 그녀와의 상담에 임하는 것이 당시에는 예의가 아닌 거 같았다.


K는 언젠가부터 이곳에서 약 두 달째 머무르고 있는 미국인 J와 연인처럼 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냥 절친 개념인가 했다. 그녀에게는 타이베이에 이미 약혼한 파트너가 있으니까. 그런데 나중에는 "아니, 저 정도면 그냥 선을 넘었는데" 싶을 정도로 그들의 애정행각은 농밀해졌다.


두 사람은 4인 도미토리에서 각각 1층침대, 2층침대에 머물렀는데, 종종 도미토리 내 화장실에서 함께 “오랫동안” 샤워를 하느라, 다른 게스트들이 외부 공용 화장실을 쓰는 일까지 벌어졌다. 목요일 영화의 밤 이벤트에 한 캐나다인 게스트가 늦게 도착해 영화의 3분의 1을 놓친 일이 있었다. “등산하고 샤워하느라 늦었다”란 그의 말에 K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미안해, 사실 나랑 J가 샤워를 조금 오래하고 있었어. 우리 잘못이야”라며 J의 얼굴을 꼬집었다.


그리고 이들은 약 일주일 차이를 두고 각각 체크아웃하며 헤어졌다. J는 스페인으로, K는 캐나다 친구 결혼식으로. 훗날 다른 친구들과 이야기하면서 알게 된 것은 K의 폴리아모리 성향을 현재 약혼한 타이베이 파트너도 알고 있다고 사실이었다. 그녀는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타이베이 파트너를 포함해 관계를 이어가고 있는 다른 파트너에게 이를 알렸고, 이들이 모두 동의하면 그 새로운 관계 역시 이어간다고 했다.


"그러니까 K는 바람피우는 게 아니라, 동시에 여러 명을 사랑할 수 있는 자신의 성향을 파트너들에게 고백하고, 이들의 동의를 구해 새로운 관계로 확장한다는 거지?" 나에게는 너무나 낯선 이 개념은 미국과 유럽에선 지지하건, 혐오하건 간에 개념 자체는 꽤 널리 퍼져 있었다. 나를 제외하고 모든 친구들은 폴리아모리가 낯설지만, 그에 대한 이해도가 상대적으로 높았다.


"응, 맞아. 그런 의미에서 K는 건강한 관계를 진행하고 있는 거지" 알리제가 대답했다. "그럼 J와 지금 각자 갈 길을 가면서도 꾸준히 관계를 유지하는 건가?” 문득 J와 K가 지금도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K에게는 대만에 있는 약혼자 뿐 아니라, 온라인으로 꾸준히 연락을 이어가는 다른 파트너가 2~3명 있다는 사실을, 그녀와 코칭 세션을 진행했던 친구들이 알려줬다. "흠... 내 생각엔 이 둘은 진지한 관계라기보단, 그냥 서로 가볍게 즐긴 사이인 거 같아" K와 유독 친했던, 중국계 미국인인 케이시가 말했다. "내가 K에게 물어봤거든. 다시 만날 일은 아마 없을 거라고"


여기에 깊은 영감을 받은 네덜란드 여자 C는 멕시코 남자친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 만난 다른 멕시코 남자 J에게 매력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K와의 상담 세션이 끝난 후, C는 용기를 내어 그녀의 남자친구에게 "혹시 폴리아모리 해도 되냐"고 물어봤다가 남자친구가 학을 뗐다고 했다. 여전히 뿌리깊게 자리잡은 멕시코 마초이즘 문화에서 받아들일 리가 만무했다. 결국, 그녀는 입맛만 다시며 우리 여자들끼리 있을 때 조용히 말했다. "솔직히 J는 진짜 매력있어. 지금도 살짝 끌리는 걸"


폴리아모리는 기존 전통 사회 관념, 도덕적 기준으로 보면 선뜻 받아들이긴 어려우며 여전히 논란이 많다. 혹자는 폴리아모리는 상처받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하는 이기적인 사랑이라고도 비판한다. 옳고 그름을 떠나, 다양한 사랑 유형을 새롭게 정의하고 그에 대한 토론이 활발하게 이뤄지는 사회가 부러웠다. 문득, 한국에서는 이러한 관계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회적 인식 때문에 표면상 드러나지 않는 것인지, 혹은 이러한 개념 자체가 사회적으로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애초에 생겨나지 않는 것인지 궁금했다. 어쩌면 서구권에서도 폴리아모리라는 단어가 생겨났기 때문에, 그 전에는 많은 사람들을 동시에 좋아하는 것에 떳떳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스스로를 폴리아모리라 부르기 시작하며 이를 정당화하기 시작한 건 아닐까.


캐나다 철학자 이안 해킹(Ian Hacking)은 어떤 개념이 생기면 사람들이 그에 맞춰 자기를 구성하고, 그 결과로 개념이 다시 바뀌거나 정교화되는 현상을 정의하며, 이를 루핑 효과(Looping effect)라 불렀다. (《The Social Construction of What?》(1999)) 즉, 과학이나 의학, 사회에서 만들어낸 새로운 진단이나 개념이 사람들의 자기이해 방식을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다중인격장애(MPD)란 진단이 생기자, 이전엔 없던 양상으로 사람들이 증상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ADHD도 마찬가지로 진단 기준과 명칭이 생기자, 과거엔 그저 주의산만으로 여겨왔던 사람들이 ADHD를 호소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워낙 ADHD가 소셜미디어를 통해 남용되어서, ADHD가 하나의 트렌드가 된 게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다.


옳고 그름과 상관없이, 자신의 성적/연애 취향을 당당하게 드러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속한 사회가 그들을 다양성으로 존중해주는 문화 자체는 본받을 만하다. 어쩌면 이들이 자신의 취향을 뚜렷하게 알고 그에 맞는 관계를 조성하고 유지한다는 것 자체가 본질적으로 더 건강한 관계일 수도 있겠다. 표면상, 사회 통념을 깨는 관계이지만, 누군가가 정한 사회통념 역시 다수가 정한 암묵적인 규칙에 불과하며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자연스러운 흐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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