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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진 Nov 11. 2019

14.반지하

[시골도 백구도 처음입니다만]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조그만 회사에 취직했다. 집을 구해야 하는데 가진 돈은 아버지가 쥐여주신 50만원과 미처 다 갚지 못한 학자금 대출 300만원 뿐. 즉, 마이너스 250만원의 밑천으로는 무엇도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마침 학과 동아리 선배가 지내는 반지하 방 두 칸짜리 집에 동기 몇 명도 얹혀 지내고 있었다. 염치 불고하고 선배가 자비를 베풀어주시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시작한 월급쟁이의 서울 생활, 선배에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이 하나, 둘 늘었고, 방 두 칸짜리 반지하 주택에 동거인이 무려 8명까지 늘어났다. 야근과 철야가 잦은 건축설계라는 직업을 가진 1~2년 차의 사회 초년생이 대부분이었기에 유지됐던 주거생활이지만, 어쨌거나 지금 생각해보면 그 선배는 참 대단한 분이다. 불교에서 대자대비한 마음으로 중생을 보살피는 천수관음보살에 버금가는 포용력을 가진 분이랄까.


건축설계업이라는 직종 자체가 월급이 넉넉하지도 않고 매일 야근과 철야에 시달려 여유를 누릴 틈이 없었다. 게다가 선배에게 얹혀사는 ‘민폐 덩어리 후배’라는 자격지심이 여가활동이라는 사치를 부릴 수 없게 마음을 옥죄었다. 어쩌다 일찍 퇴근하면, 집에서 TV나 보며 시간을 보내고 집 바로 옆 대학교 캠퍼스를 산책이나 운동 삼아 헤매다 오는 것이 박봉의 월급을 절약하는 길이기도 했다.


동거인이 늘수록 집 안의 모든 물건은 사유 개념이 사라졌다. 없이 사는 형편에 음식을 나눠 먹는 것은 당연하지만, 속옷과 양말 등 최소한으로 보장받아야 할 사적인 경계마저 무너진 지경에 이르렀다. 해봐야 티도 안 나는 청소와 빨래는 요원한 이야기였으며 주방, 거실과 방의 경계마저 점점 사라져갔다. 한 주거공간에서 여러 명과 함께 산다는 것. 다른 건 참고 견디겠지만, 가장 힘들었던 시간은 주말이었다. 다른 집에 사는 선후배와 동기까지 모두 모여 왁자지껄 친목 도모 카드놀이 판이 벌어졌다. 노름의 ‘노’자에도 치를 떨며 싫어하는지라, 이런 상황이 반복되자 더는 고맙지도 감사하지도 않은 집으로 변해갔다. 모처럼 출근하지 않는 주말이 돼도 집 밖을 떠돌거나, 혼자 여행을 가서 외박하고 오는 날도 잦았다. 일부러 야근하거나 밤거리를 쏘다니다 집에 와 잠만 자고 나가는 날이 비일비재해졌다.


그렇다, 사람은 간사한 동물이며 나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구세주 같았던 선배의 반지하 방 두 칸짜리 집에서 탈출할 날만 꿈꾸기 시작했다. 얹혀사는 주제에도 견디기 힘들었는데, 동거를 허락해 주셨던 집주인 선배 입장은 오죽했을까 마는 당장 나부터 살고 봐야겠다는 이기심이 싹텄다. 한 번 싹이 튼 마음은 깨끗한 물에 떨어진 잉크 방울처럼 점점 크게 번졌다. 결국 스물여덟 살에 처음으로 부동산 문을 두드려보았다. 당시에는 마치 월세 시장의 암구호 같았던 ‘5백에 3십’. 8~90년대에 지어진 오래된 다세대 주택 반지하 또는 옥탑방 월세의 보편적 기준선 같았다. 월세 3십 아래의 집은 그 나름대로, 3십 위의 집은 또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세후 월급이 80만원 후반대였던 2년 차 월급쟁이에게 보증금 5백만원은 너무 큰 금액이었다. 보잘것없는 신용으로 대출 가능한 최고한도는 얄궂게도 딱 5백만원. 세상의 모든 건물주와 금융 관계자 간에 모종의 담합이 있지는 않을까 음모론 마냥 의심이 들 정도였다. 반년 동안 숨만 쉬며 월급을 모아야 겨우 만져볼 수 있는 ‘5백만원’. 그 돈은 천국행 티켓값이라는 자기최면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신체포기각서를 쓰는 심정으로 대출계약서에 서명하고 반지하 방 두 칸짜리 독립된 공간을 구했다. 당장 필요한 살림살이는 신용카드 장기할부에 의지했다. 내일의 힘을 오늘 당겨쓰는 ‘에너지 드링크 인생’이 화려하게 막이 올랐다.


독립된 나만의 공간이자, 생계의 지옥문이며, 철창 없는 감옥을 내 돈 들여 자체 제작한 셈이다. 이사한 첫날 밤의 기분을 아직 잊지 못한다. 8명이 북적거리던 공간을 떠나 방 두 칸짜리 집에서 혼자 지내면 더없이 편안할 줄 알았다. 몸은 편할지언정 이제 온전히 홀로 모든 일을 헤쳐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불편했다. 마치 장마철 실내에 널어놓은 빨래처럼 점점 축축해졌다. 80만원 후반의 월급에서 월세, 대출이자와 원금, 카드 할부금, 통신요금, 공과금이 빠져나가고 남은 금액은 교통비와 밥값을 메우기에도 빠듯했다. 독립된 공간을 얻은 대신, 내일의 월급을 당겨쓰는 혹독한 신용카드 인생에 무모하고 대책 없이 영혼을 저당 잡혔다.


아무튼 그렇게, 불편했지만 딱히 피해랄 것 없었던 동거생활은 끝났고, 편안했지만 빚만 가득한 피 말리는 독거생활의 막이 올랐다.


해가 지날수록 더 좋은 곳으로 이사를 하며 주거환경은 조금씩 나아졌지만, 항상 만족하지 못했고 작은 불편함에 큰 괴로움을 느꼈다. 좋아진 부분보다 작은 불편함이 삶을 지배하는 걸까? 마당 있는 집을 갖겠다는 욕심을 억누르지 못했다. 결국, 서울을 떠나 남해에 내려와 농가주택을 계약한 후에도 똑같은 감정노동이 반복됐다. 태어나 처음 ‘내 집’을 가졌지만, 불편함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도시에서 상상조차 못 했던 불편함이 닥쳐왔다. 마당 있는 집은 곧 잡초와의 전쟁이 시작됐음을 의미했다. 뿐만 아니라 풀이 있으면 곧 생명체가 몰려드는 법. 육해공을 넘나드는 온갖 벌레, 파충류와 동거도 시작됐다. 해충퇴치업체 상담원마저 농가 주택은 어쩔 수 없다고 마음을 비우라며 위안인지 아닌지 모를 말을 건넸다.


결국 ‘시골에서는 아파트지!’라며 첫 번째 ‘내 집’과 이별하고 지금은 공동주택에서 살고 있다. 누군가 그랬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라고. 그래도 스물여덟의 그 해처럼 무모하진 않아 다행이었다. 인생이 생각과 계획대로 되진 않지만, 어쨌든 나름의 계획도 있고 인제야 깨우친 한 가지 사실 덕분에 남해에서 큰 탈 없이 5년째 머물고 있다. 앞으로도 그럴 수 있길 바라며.


‘바뀌어야 하는건 불편한 환경이 아니라 내 마음이다.’


▶ 우리, 그때 안 만나서 천만다행이야! 마당 있는 집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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