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창작 세계 확장, 효능감과 사회적 교감, 그리고 진정한 자립
안녕하세요. 플러수렴입니다.
길었던 이번 연휴, 어떻게 지내셨나요.
저는 이번 연휴 동, 새로 시도&성공한 요리들의 리스트를 꽤나 업데이트했답니다.
그 리스트들을 읊어보자면요,
단호박바스크치즈케이크
황태전복미역국
잡채
카프레제 샐러드(이건 너무 간단해서 '요리'에 넣어도 될 지 모르겠지만)
안동찜닭 (생닭을 재료로 써서 무언가를 만들어본 건 처음... 대단했다 나 자신)
우엉조림
미역초무침
흠... 리스트가 짧아보여서
9월에 했던 음식 리스트까지 추가해볼게요.
가지김치 (올해 목표가 김치만들기였는데, 인생 첫 김치를 해냄!! 맛도 성공적!)
전복강된장
배추초절임(처음 만들었는데 가족들 극찬, 그 후로 두 통이나 더 만듦)
가지계란볶음 (가지를 소금으로 절이고 꾹 짜내어, 식감이 물텅하지 않고 쫀쫀한 것이 특징)
굴소스배추볶음 + 건새우를 곁들인 (건새우는 그냥 내가 마음대로 넣은 건데 이게 킥이었다)
돼지불고기, 소불고기
시댁에서 한달살이를 하면서 이런저런 음식을 많이 해보았는데요.
식구들이 '맛있다'며 먹는 그 순간을 기대하면서
음식을 하는 순간이 참 즐겁더라구요.
여러 레시피들을 쭉 본 후에,
결국에는 나만의 스타일로 어떤 음식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마치 연금술을 하는 듯한,
어떤 마법을 부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구요.
'와, 이게 정녕 내 손으로 만든 음식인가'
'나는 요리 천재인가?'
스스로 설레발칠만큼 맛있을 때는
짜릿하기까지 합니다. (그랬던 음식 : 가지김치 ← 그야말로 올해의 업적)
시부모님께서도
같은 재료이지만
전혀 다른 스타일의 반찬들이 탄생하니
먹는 즐거움이 더해졌다고
좋아하시더라구요.
신랑도 예전에는
“내가 해주는 음식 중에 혹시 그립고 먹고 싶은 게 있어?”
라고 물으면
“딱히 없다”고 답하던 사람이었는데요.
요즘은 이것도 맛있고, 저것도 맛있다고 하니
제가 자신감을 충전하지 않을 수 없어요.
이러한 기쁨들이 하나둘 쌓이다보니
냉장고 속 재료들을 보면서
'이 다음엔 어떤 요리들을 만들어볼까' 생각하는 게
요즘의 일상이 되었습니다.
이전에도 음식을 해먹었지만
유독 요즘 요리를 즐기는 이유를 생각해보았어요.
먼저, 필요한 모든 재료가 풍족합니다.
시어머니의 텃밭과 냉장고에는
제가 필요로 하는 재료들이 거의 다 있어요.
특히 소스류와 야채들요.
그러다보니, 어떤 특정 재료가 없어 어떻게 대체할까 고민할 필요 없이,
그저 숭덩숭덩 썰고, 끓이거나 볶으면 끝입니다.
둘째, 제가 요리하는 동안 옆에서 뒷정리를 이것저것 해주셔요.
음식할 때 스트레스 중 하나는,
'싱크대에 쌓여가는 설거지거리'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제가 음식을 하는 동안
옆에서 그런 것들을 정리해주시니
저는 오로지 '만드는 것'에만 집중할 수 있어요.
셋째, 무한한 칭찬입니다.
'요리를 겁없이 쉽게 쉽게 한다'
'어쩜 이렇게 예쁘게 썰었냐'며
시어머니께서 요리과정과 완성된 음식 모두에
감탄과 칭찬을 아끼지 않으시니
저의 자신감은 한층 더 충전됩니다.
(케이크 굽다가 그릇을 깨먹었지만 그래도 혼나지 않았어요...)
어쩌면 최근 '폭군의 셰프' 드라마를 재밌게 봐서
요리가 더 재밌는 게임처럼 느껴지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요즘 요리를 하면서,
‘직접 자신의 손으로 음식을 하는 것’의 가치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는데요.
요리는 단순히 한 끼를 해결하기 위한 것,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지는 것 같아요.
모든 오감(시각, 후각, 청각, 촉각, 미각)을 활용하는,
몸 전체로 경험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집중하는 동안 잡생각이 사라지고 마음이 정리되는 느낌이 들어요.
또한, 요리는 사회적 교감이기도 합니다.
내 음식을 함께 먹으면서 기뻐할 사람이 없다면,
요리의 즐거움은 한결 줄어들 거예요.
내가 이 요리를 완성했을 때,
내가 좋아하는 이들이 지을, 기쁜 얼굴과 만족한 얼굴.
그것이 요리의 한 축이자 원동력인 거죠.
(한동안 제가 밥을 해먹는 것이 싫었던 이유가 이 '사회적 교감'적 요소가 빠져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이 사회적 교감을 배제하더라도,
저는 ‘자기 손으로 음식을 해먹을 수 있다’는 경험이
한 개인의 자기효능감에도 큰 영향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먹는 음식의 선택지가
배달, 포장, 외식, 부모님께 받은 반찬뿐만이 아니라
내 손으로 내가 만든 요리가 있다는 점은,
일상 속 자립감과 만족감을 높여줄 수 있으니까요.
한때는
주부들의 일상, 엄마들의 삶이
'고단하기만 하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어요.
삼시세끼를 만들고 뒷정리를 하는 그 일상이 그저 '희생'인 것만 같았거든요.
그런데 요즘은,
그 일상이 개인의 자아를 실현하는
굉장히 주체적인 행위이면서 동시에, 사랑의 실천이자,
다른 이들에게 자신을 깊게 새기는 행위가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어떤 음식을 새롭게 해낼 줄 알게 되고,
거기에 나의 기호를 담은 변형을 한 스푼 가할 수 있다는 경험은
개인의 효능감을 높이는 순간이면서,
인간 누구나 가지고 있는 통제욕구,
즉 ‘나의 마음대로 무언가를 움직이는 욕구’를 충족시키는 행위이기도 하지요.
그냥 재료였던 것을 더 맛있고 먹음직스럽게 만들어내며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하는 과정이니까요.
이런 일상들이 쌓이면서
그 사람만의 색깔이 담긴 음식 스타일이 형성되고,
단순한 ‘식사 준비’를 넘어
자신만의 방식과 취향이 녹아 있는 작은 창작의 세계가 만들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창작의 세계는 다른 이들의 몸과 마음 속에 깊이 자리하게 되죠.
(그 어떤 파스타를 먹어도 투박했던 엄마표 스파게티의 향수가 쉽게 사라지지 않듯이요.)
어느 날 요리를 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어쩌면 은퇴 후 부부 관계에서 힘의 균형이
‘살림을 맡았던 사람’에게 쏠리는 현상은
‘바깥일만 하던 사람’이 직접 음식을 해먹는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집안에서의 역할은 단순한 ‘노동량’뿐 아니라
자기효능감과 통제감, 일상의 자립감과도 연결되어 있다는 거죠.
일을 하던 때에는,
집에서의 식사가 아니더라도
식사를 해결할 수 있는 수단이 많았고
함께 식사할 사람도 많았겠지만,
아무래도 은퇴 후에는
집에서 식사를 하게 될 날들이 더 많아질 테니까요.
가장 기본적으로 충족되어야 할 ‘식(食)’이
내 손이 아닌, 다른 사람의 손과 의지에 의존적이라면,
그 ‘다른 사람’이 자연스럽게 나보다 더 큰 영향력과 완력을 가지게 되는 것 아닐까요?
집에서의 냉장고와 찬장은 전부 ‘살림을 해오던 이’의 세상과 철학에 맞춰져 있으니
그 살림(일종의 시스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상대적으로 '객(客)'에 가까운 위치에 놓이게 되는 거죠.
즉, 집안에서의 힘의 균형은 단순한 성격이나 권위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직접 자신의 일상과 생존 수단을 관리할 수 있는가와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친정에서 제가 요리를 하지 않았던 건,
그 공간에서 제가 '자립'할 필요 없이 부모님의 완벽한 보살핌에 '의존'하는 것을
편안하게 여겼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시댁에서 이렇게 요리를 즐기는 제가
친정에서는 '먹고싶은 음식 말하기'만 했다는 사실을 깨달아요.
그래서 엄마께서 "다 큰 줄 알았더니 아직 철딱서니가 없다"고 하셨던 걸까요.
다음 주에 친정에 가면
저의 향상된 요리실력을 십분 발휘해서
부모님께
'제가 이만큼 어른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드려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