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를 다시 읽다 5 - 유표
리더의 실패는 모두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권력 조직, 정치조직은 영향이 더 크다. 삼국지 초기 선두주자들의 실패를 보면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이 조금만 더 자신을 가다듬고 조직을 이끌었다면 역사의 흐름은 달라졌을 것이다. 예를 들어서 원소는 자신의 세력을 과신하면서 허점투성이인 채로 집단을 이끌고 나섰다. 당시 가장 큰 세력이어서 자신이 대세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잃었고 따르는 자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었다.
초기 선두주자 중 유표는 중앙무대를 벗어나 있어서 비교적 덜 눈에 띈다. 그러나 조조와 유비가 천하의 영웅이 누구인가 대화하는 중에도 나오고 관도대전에서 조조와 원소가 절체절명의 전쟁을 할 때도 유표가 어느 편에 설지 매우 신경 쓰는 것만 봐도 그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유표는 외곽 지방인 형주를 천하 제패를 꿈꾸는 영웅들이 신경 써야 할 영향력 있는 지역으로 위상을 높인 주인공이었다.
유표는 동탁이 중앙 정부를 휘어잡고 전횡을 부리기 직전에 형주의 자사로 부임한다. 당시 황실은 십상시 문고리 세력의 전횡으로 거의 힘을 잃었고 황건적과 지방 세력들이 강력해져서 중앙 정부의 지방 통제력이 거의 없는 상태였다. 그리고 형주는 중앙 정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런 형주는 내부 세력끼리 다투면서 춘추전국과 비슷한 상황을 벌리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군사 한 명 없이 혼자 낙하산처럼 부임해 오래 결리지 않아 지방을 안정시키고 군사력을 갖춘 지역으로 변화시킨 것을 보면 그가 결코 만만치 않은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수단을 엿볼 수 있는 것이 당시 형주 지역의 최대 세력인 채씨 가문의 여인을 아내로 맞이해서 권력의 기반을 공고하게 한 것이다. 고려를 세운 왕건이 백제 지방을 점령할 때 그 지역 유지 가문과 정략결혼 했던 것과 비슷하다.
유표는 무너져가는 형주 지역을 되살리고 당시 군웅들이 신경 써야 할 영향력 있는 지역으로 변화시켰다. 전쟁 없는 평화로운 지역이 된 것이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전란을 피해 온 사람도 있었고 섬길 주공을 찾는 유능한 인재도 있었다. 대표적인 인재가 서서(원적,유비의 참모였다가 나중에 조조의 참모가 됨), 수경선생 사마휘, 제갈공명 등이다.
유표가 통치하던 형주는 삼국지 전체를 통틀어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위 촉 오 세 나라가 외부로 확장하려 면 그곳이 필요했고 반대로 외부의 세력을 막으려고 해도 필요했다. 발판도 되고 방패도 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많은 군웅이 형주를 탐냈으나 유표는 만만치 않은 군사력을 갖추고 나름의 지위를 안전하게 확보하고 있었다.
무너지다가 혁신하여 바로 세워진 조직은 계속 번영 발전해야 하는 과제의 단계로 넘어간다. 외부의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과제의 내용도 달라져야 한다. 과제를 변화시키지 못하면 조직은 서서히 멈추어 선다. 그러나 제자리걸음은 자기 생각일 뿐, 배처럼 물이 흐름에 따라 하류로 서서히 흘러내린다. 현재 위치 고수가 아니라 점진적 퇴보다.
유표는 그런 어리석음을 범했다. 지금의 성공을 과신하고 안주했다. 외부의 환경 변화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않았고 일정 거리를 두며 환경과 자신을 차단하는 고립전략을 선택한 것이다.
형주의 운명을 바꿀 큰 기회가 세 번 있었다. 첫 번째 기회는 관도대전이었다. 당시 조조는 원소보다 세력이 작았다. 유표는 한나라 왕실의 후예였고 조조는 국정을 농단하는 원흉으로 소문나 있어서 명분상 유표가 유리한 입장이었다. 만일 유표가 원소 편을 들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조조가 원소를 꺾고 천하의 주도권을 잡는 것이 쉽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유표는 누구의 편도 들지 않았다. 조조를 방조한 셈이 된 것이다.
두 번째 기회는 관도대전이 끝나고 조조가 잔당을 소탕하던 기간이었다. 당시 유비는 형주의 산야 지방에 머물며 유표와 교류하고 있었는데 유표에게 지금 조조의 근거지인 허도를 공격해서 세력을 키우고 중앙으로 진출하라고 건의한다. 그러나 유표는 모험을 거부한다. 만일 유비의 건의대로 했다면 어찌 되었을까? 조조가 천하 주도권을 잡는 것이 더 어렵거나 오래 걸렸을 것이다.
세 번째 기회는 병약해진 유표가 유비에게 형주자사를 맡아달라고 부탁할 때다. 유표는 나빠진 건강과 조조 세력의 위협, 미덥지 않은 두 아들 때문에 고민하다가 유비에게 맡기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그런데 유비는 도리가 아니라며 거절한다. 유표는 몇 번 더 권하다가 알았다는 듯 더 권하지 않는다. 인사치레로 몇 번 말해 본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절박한 결단이고 그것만이 모두가 사는 최선의 대안이라면 좀 더 적극적이고 끈질기게 권해야 하지 않았을까.
결정적인 순간은 자주 오지 않으나 놓치면 리더와 그를 따르는 조직 모두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천하 군웅이 모두 탐냈고 초기 성공적으로 세력을 구축한 형주였으나 길게 존속하지 못하고 무너져 이리저리 주인이 바뀌고 전쟁터가 되어 버린다. 유표 역시 초기 대권주자 중 실패한 한 사람이 된 것이다. (계속)
<2021. 6.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