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이중생활 또는 욱이의 이중기준?
아침에 바나나를 먹다가 하나가 남아서 과일 바구니에 가져다 놓으라 했더니 욱이는 바나나 꼭지의 끝을 살짝 잡아서 바구니에 넣은 후 즉시 물로 손을 닦았다. 바나나 껍질에는 농약이 많이 묻어 있다는 것이 그의 평소 주장이다. 이를 본 나는,
"남자가 너무 깔끔 떨면 비호감이야." 했다.
욱이는 즉시 반박했다.
"그렇게 말하는 아빠가 더 비호감이에요. 요즘 세상에 그게 무슨 성차별적인 발언입니까?"
헐, 성차별적인 발언이라니. 내가 여성을 차별한 것도 아니고 우리 사회의 통념상 남자가 너무 깔끔한 척하면 친구들 사이에서 눈총 받는다는 얘기를 한 것이다. 욱이는 한 술 더 떠서 얘기했다.
"아빤 가만 보면 평소에 소수자의 인권, 어쩌고 하면서 생활 속에서는 차별적인 얘기들을 하는 것 같아요. 지난번에 구걸하는 사람 봤을 때도 그렇고요. "
헉, 너무 깔끔 떨지 말라는 얘기가 이 정도의 공격을 받을 이야기 이던가. 하지만 나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너털웃음으로 대해주었다. 전에 얘기했듯이 아들과 외국에서 둘이 지내는 것은 아빠의 수양이기 때문이다.(물론, 반대로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이곳 캘리포니아에는 운전하다 보면 종이박스 조각 같은 데에다 'I need help' 같은 말을 써서 들고 구걸을 하는 사람들을 가끔 만난다. 어느 날 길을 가다가 구걸하는 사람을 보며 내가 한마디 하며 혀를 끌끌 찼다.
"멀쩡해 보이는 사람이 뙤약볕에 하루 종일 서서 구걸하느니 아르바이트라도 하지."
욱이가 또 목소리를 높였다.
"아빠, 그렇게 말하면 안 되죠. 저 사람이 몸이 아플 수도 있고 정신적인 문제가 있을 수도 있는데 아빠의 기준으로 그렇게 함부로 말하는 건 좀 아니라고 생각해요."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그 사람의 문제를 알지도 못하면서 내 시각에서만 바라보고 그 사람을 판단한 것이니까. 나도 나름 인권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려고 했지만, 아들의 눈에는 표리 부동한 것들이 잘 보이나 보다.
요즘 PC(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올바름)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다. 기존에 썼던 성차별적인 표현이나 농담도 조심하고 다시 한번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곳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여자 집주인을 의미하는 호스티스(Hostess)라는 말은 쓰지 않는다. 나도 그 단어 대신에 쥴리를 Host lady라고 소개한다. 회의 등의 의장을 의미하는 chairman 대신에 chairperson, 테니스 경기에서도 예전에 선수들을 위해 공을 집어주는 친구들을 Ball boy라고 부르다가, 이후 Ball kid, 지금은 Ball person이라고 한다. 이곳에서도 외모에 관한 칭찬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해서 지금은 외모가 아닌 능력을 중심으로 칭찬하라고 가르친다.
세상은 변했고, 지금도 변하고 있다. 인권이라는 잣대로 보면 발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소수자나 차별받는 이들의 인권이 곧 우리 사회의 인권의 척도가 될 것이다. 나는 지금껏 진보적인 지향을 가지고 살아왔다고 스스로 믿어왔다. 하지만 나도 이제 꼰대 같은 발언을 나도 모르게 하는 아재가 된 것이다.
물론 나도, 또는 우리 세대도 욱이를 비롯한 젊은 세대에게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떤 말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하는 가도 중요하지만, 삶 속에서 보이는 실제 행동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 정치적 올바름 얘기하다가, 조금 옆으로 새는 것 같기는 하지만, 아재들이 젊은 세대들에게 가지는 불만을 우리 집을 예로 들어 잠시 얘기해보고자 한다.
우리 기성세대는 때론 개인적인 불이익을 감수하며 우리 사회의 정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나서기도 했다. 그 결과로 이제 적어도 체육관에서 대통령을 뽑는 일은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부모세대에게 의존하기보다는 스스로 적극적으로 삶을 꾸려나가려고 했다고 생각한다(우리 아버지 세대에게 많이 듣던 영화 국제시장 같은 얘기를 나도 하고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물론 지금의 젊은 세대들이 우리 때보다 경쟁도 더 심하고 취업하기도 힘들며 계층 간의 사다리가 좁아 자수성가가 훨씬 어렵다는 것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욱이의 세대, 소위 MZ세대는 부모로부터 너무 많은 것을 받는 데 익숙한 것은 아닐까. 그래서 때로는 돈의 소중함을 잘 모르는 것 같기도 하고 조금 해보다가 안되면 쉽게 포기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가끔 든다.
주말에 인근 공원에 가보면 이곳 캘리포니아에서도 한국 엄마들이 아이들이 공원에서 쓰레기 줍는 봉사활동을 하는 것을 조직해서 마치고 사진을 찍는 것을 본다. 물론 한국 엄마들만 이러는 것은 아닐 것이다. 대학 입학에 필요한 봉사활동 실적을 위해 엄마들이 나서는 것은 이곳 사회에서도 흔한 일이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친구와 노는 것부터 봉사활동까지 엄마가 짜주는 프로그램에 수동적으로 참여하는 것에 익숙한 것 같다.
얼마 전에 디즈니랜드에 갔을 때의 일이다. 가장 인기 있는 웹슬링어라는 놀이기구는 미리 앱에서 예약을 하고 정해진 시간까지 가야 한다. 출발이 늦어 예약시간에 늦게 되었는데, 나는 놀이공원에 도착하자 입구에서부터 뛰자고 하며 앞서 뛰었다. 그런데 욱이는 뛰지 않고 걸어오고 있었다. 욱이는 이미 늦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늦더라도 최선을 다해보자고 얘기했지만 욱이는 뛰지 않았다. 물론 한참을 기다려서 놀이기구는 탈 수 있었지만, 나는 최선을 다해보지 않는 욱이의 태도가 못 마땅했다. 최선을 다하면 안 되더라도 후회가 남지 않지만 그렇지 않으면 좀 더 노력해볼 걸, 하는 후회가 남을 수 있다. 나를 포함한 우리 아재들은 그렇게 살아왔다. 아, 또 나왔네. '라떼는 말이야~ '
욱이는 가끔 내게 말한다.
"저는 조그만 일에도 가족들에게 생색 엄청 내고, 소심하고 쪼잔한 아빠의 실체를 너무 잘 알거든요."
그러면 나는 말한다.
"아빠가 무슨 예수냐? 아빠도 사람이고 단점이 있고 실수도 하고 그런 거지."
허나, 생각해보자.
욱이가 나에게서 보는 '말과 행동이 다름'은 MZ세대가 기성세대를 보는 시각을 대변하는 것일 것이다. 돌아보아야 한다. 스스로 진보적이고 소수자의 인권에 대한 감수성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생활의 영역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은 모습이 드러날 수 있다.
하지만, 욱아
잣대는 우선 스스로에게 먼저 들이대고, 그러고 나서 남에게 대는 것이 맞지 않을까. 사회에 대해서는 좀 더 적극적으로, 자기 생활에 대해서는 좀 더 독립적으로 나서면서 우리 아재들을 지적한다면 너희들의 충고가 더 잘 와닿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