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윤 <바늘 끝에서 몇 명의 천사가>
가정 폭력 피해자의 시점에서 폭력이 사람의 내면을 어떻게 파괴하고 고통을 주는 지를 독자들에게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또한 여기에 그치지 않고 폭력의 피해자들 사이의 연대와 연민을 통해 이웃에 무관심한 우리 사회에 ‘조금만 더 관심을 가져달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작품은 아직까지도 데이트 폭력 내지는 짝사랑으로 치부되기도 하는 스토킹이라는 무서운 범죄를 소재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얼굴만 알고 인사 정도만 하고 지내던 학과 조교가 무서운 스토커가 된 사건 속에서 주인공 하진은 극심한 공포와 함께 사건이 안일하고 허술하게 처리되는 방식에 절망한다. 내 가장 사적인 공간인 침대에 낯선 남자가 무단 침입해서 ‘울고 간’ 상황은 젊은 여자인 하진이 공포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하진은 집안 곳곳에 카메라가 숨겨진 것은 아닌지, 언제 어디서 남자가 나타날지, 늘 두려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경찰이 사건을 다루는 방식은 사랑 때문에 일어난 해프닝 정도로 보고 있으며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진정 어린 사과를 하지 않고 경찰, 학교, 피해자의 어머니에게만 사과하고 있다. 이 대목은 독자들의 공분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히 잘 묘사되고 있고 독자들을 작품 속으로 끌어들인다.
하진의 집에 불법 침입이 일어났고 하진이 신고해 범인을 잡았음에도 모든 처리 과정에서 정작 하진만이 배제된 느낌이었다.
하지만 작품이 진정으로 하고자 하는 얘기는 스토킹이 아니었다. 스토킹은 예전 어릴 적에 겪은 가정 폭력이라는 트라우마를 되새기게 하는 계기이자 두 명의 가정 폭력 피해자인 하진과 유영이 서로 연대하게 되는 유용한 장치로 쓰이고 있다.
어릴 때 개에 놀란 아이는 커서도 개를 무서워한다. 하물며 엄마가 자신을 죽이려고 한 끔찍한 사건을 겪은 아이가 평생 겪을 공포는 짐작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렇게 잠재된 하진의 트라우마와 공포는 스토킹 사건으로 증폭되었고 결국, 엄마에게도 터진다. 터질 것은 터지게 되어 있다. 이 작품의 클라이맥스는 이 부분이 아닐까 싶다.
특히 엄마와 통화하는 장면을 유영과 대화한 장면과 섞어서 배치한 부분이 압권이다. 기억이 돌아오지 않도록 감추는 사람이 범인이라는 대목에 이르면 트라우마를 없는 것으로 여기고 감추는 것은 해결책이 아님을 느끼게 해 준다.
하진이 유영을 처음부터 쉽게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옆집 사람인 유영이 자신에게 접근하는 이유를 의심했고 유영도 일부러 거리를 두려고 했다. 하지만 우연찮게도 이들은 중학교 시절에 만난 적이 있고 가정 폭력의 피해자라는 공통점이 있다. 유영은 머리를 다쳐 하진과의 일을 기억 못 하지만 하진은 그녀를 기억해 낸다. 하진은 당시 ‘커튼을 끌어다 유영의 사이에 선을 그었다.’에서 볼 수 있듯이 그녀의 손길을 매정하게 뿌리친다. 그러던 상황이 반전되어 나중에는 유영의 도움을 받게 되는 설정도 효과적이다.
유영의 캐릭터가 돋보인다. 유영은 옆집에서 나는 소리를 일부러 이웃에게 알려서 스토킹 사건이 밝혀지게 하고 두려워하는 하진에게 기꺼이 자신의 공간을 내주면서도 하진이 불편해하지 않도록 적당한 거리를 두는 배려까지 한다. 유영은 극심한 가정 폭력을 겪고 아마도 이 폭력에 의해 기억을 부분적으로 잃게 되는 큰 머리부상을 입었으며 아무도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 절망적인 세월들을 견뎌냈지만, 이제는 폭력의 피해자일지도 모르는 이웃들을 위해 ‘말 걸고’, ‘무슨 일인지 알아보는’ 용기 있는 시민이 되어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도 윗집에서 나는 소리에 하진이 붙잡아도 기어코 가보는 그녀의 모습은 인상적이다. 또한 이런 유영의 모습을 보며 말리던 하진도 결국 ‘같이 가’라며 변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무서운 폭력의 트라우마로 힘들어하는 두 청춘이 서로 연대하고 공감해 가는 과정 속에 이 작품의 주제가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유영이 ‘나는 그때 매일매일 기다렸어...누가 나를 도와주기를’이라고 말하고 ‘그럼 나도 같이 가’라고 하진이 말하는 것이 이 주제를 잘 드러내고 있다.
작품 속 소재로 쓰인 영화 메종 드 히미코의 오다기리 조 이야기는 유영이 폭력 속에서도 영화를 통해 처참한 현실을 견뎌내는 것을 보여주면서도 ‘반 뼘만 바지를 내려주면 저 엉덩이가 숨을 쉴 수 있을 텐데’를 통해 숨을 쉴 수 없이 끼어버린 유영의 상황을 상징하기도 하는 소재이다.
제목으로 쓰인 ‘바늘 끝에서 몇 명의 천사가’는 중세시대 신학자들이 세상에 수많은 천사들이 내려와 있다고 믿으며 바늘 끝에서 몇 명의 천사가 춤을 출 수 있는 가를 논쟁했다는 것에서 차용한 것이다. 가난, 폭력, 차별 같은 엄혹한 현실 속에 하늘에서 내려오는 천사는 없다는 것을 비트는 것으로 보인다.
기다려도 수호천사는 오지 않는다. 다만, 우리들이 서로의 천사가 되어 줄 수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