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영 <홈 스위트 홈>
집이라는 소재를 통해 죽음과 영혼,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펼치고 있는 작품이다.
남자친구와 동거하며 도시를 떠나 시골살이를 하고 있는 주인공은 암 선고를 받고 육체적, 정신적으로 피폐해져 있다. 그녀는 자신이 기억하는 집이 미래의 집이라고 믿으며 새로 구한 폐가를 리모델링하게 된다. 집은 편안함을 주는 공간이다. 물리적 공간일 뿐만 아니라 영혼의 안식처가 되는 곳이다. 자신이 꿈꾸는 집을 새로 만드는 일은 결국 영혼이 편안해지는 일이며, 암 투병 중인 화자에게는 결국 흙으로 돌아가는 길에 있음을 받아들이는 일로서 “나는 이 집에서 죽어”라고 하며 자신의 미래를 선택하는 일이다.
작품 초반에 화자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분명 일어났으나 아무도 모르는 일들. 기억하는 유일한 존재와 함께 사라져 버리는 무수한 순간들. (중략) 폭우의 빗방울 하나. 폭설의 눈송이 하나. 해변의 모래알 하나. 그 하나가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
그리고 기억에 대해 얘기한다.
‘아주 많은 것을 잊으며 살아가는 중에도 고집스럽게 남아 있는 기억이 있다.’
작품 마지막에서 화자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한다.
‘그 하나가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화자는 기억이라는 타자의 인식을 통해 그 존재가 유의미해진다고 말하는 듯하다. 존재는 기억을 통해 살아남기도 하고 잊히기도 한다.
불치의 병에 걸린 주인공은 그 고통스러운 과정에서 깨달음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출생과 죽음, 성장과 노화, 발생과 소명을 시간이란 개념 바깥에서 이해하고 싶다. (중략) 죽음 다음이 있다면, 어쩌면, 시간에서 해방된 무엇 아닐까.’
시간이라는 개념에서 벗어나서 인생을 바라보는 일이란 뭘까.
화자가 얘기하듯 ‘얼음이 물이 되고 물이 수증기가 되듯 바뀌어 달라지는 것’ 속에서는 시간이 무의미해질 수도 있다. 우리가 태어나고 병들고 죽는 것도 실은 대자연에 존재하는 원소들의 변형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나라는 존재는 그냥 원래부터 존재하던 흙과 같은 것이고 잠시 생명체로 변했다가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인생으로 본다면 탄생과 죽음이라는 시간의 틀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얘기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른 차원의 믿음’이 필요했다는 것과 ‘염원, 기도, 나의 상태를 나타내는 숫자 바깥에 있고 싶었다’는 대목에서도 이런 관점이 드러난다.
작품 속 엄마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돕는다.
‘이해하지 못한 채로도 이렇게, 도대체 말이 안 된다고 하면서도 나보다 먼저 무언가를 말이 되게 할 것이다’
연인 어진은 진심으로 나를 위해 울어주고 내 곁에 있어준다. 엄마와 어진이 있기에 주인공은 힘을 내어 집을 짓겠다는 결심을 한다. 주인공은 엄마에게 ‘내 몸이 죽으면 내 영혼도 죽는 거야.’라고 얘기하지만 결국 ‘사람들이 말하는 영혼이란 기억의 다른 이름’이라고 하며 가족과 연인이 있어 나를 기억해 줄 사람이 있는 것이고 내 ‘영혼’이 존재할 수 있는 것으로 인식한다.
마지막 문장에서 사소한 존재가 있는 것과 없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고 하며 ‘신은 그런 것에 관심 없겠지만’이라고 한 것은 화자가 신에는 관심 없다는 뜻으로 들린다. 작품 속에서 신에 대한 갈구나 기도는 보이지 않는다.
건강하다고 행복한 것은 아니고, 아프다고 불행한 것은 아니라는 부분, 그리고 ‘나는 나을 수 없을지도 몰라. 하지만 더 행복해질 수는 있어’라고 엄마에게 말하는 부분에서 화자는 죽음을 초월하여 자신이 선택한 미래, 즉 내가 좋아하는 내 집에서 죽고 싶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새로 고친 집에서 전에 살던 아이들이 남긴 흔적과 물건들을 버리지 않는 것은 일면 집착으로 보이기도 한다. 보내줄 것들은 훌훌 보내주는 것이 시간의 바깥쪽에 서려는 화자의 마음과 더 어울릴 텐데, 어쩌면 화자는 자신이 죽더라도 잊지 말고 꼭 기억해 달라는 요청을 하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