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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마추어리 May 15. 2022

[방안자] 아무런 자극 없는 삶을 살고 싶다

수평선처럼 고요한 마음이고 싶은 때, 자가 되고 싶었다.

방안자


사무실 한편에 세로로 누워

죽은 듯이 살아 있는

모닝글로리 컷팅 방안자가

되고 싶다


눈금처럼 정확한 심박으로

무엇도 왜곡하지 않는

투명한 시선으로

모눈처럼 일정한 루틴으로

그렇게 매일 매분 매초를


삶이 너무나 평안하여

시간을 내어 바다를 보러 가지 않아도 되는

존재 자체로 수평선이 되고 싶다


딱 30cm만큼만

내가 아는 선에서 재단하고

어려운 것은 다른 세계의 몫으로 넘겨도

한 치의 죄책감 없는 자로


그렇게 살 순 없나

아무런 자극 없는 하루

어떤 날은 그 하루가 없어서

불규칙하게 떨리는 눈가가 나를

못 자게 해

못 자게 해


피곤한 다음 날에도

허리를 세우고 어디로 걸어간다

어제와 같은 내일도 다르지 않을

하루하루를 만들기 위하여


자가 못 된 자의 원칙이다

살아있는 자의 벌칙이다



사람인 알람이 울렸다. 업계에서는 TOP3에 드는 회사였다. 중소기업에서 그릇에 안 맞는 직책을 달고 하루하루 일에 허덕이며 살 때였다.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 주변 사람들에게 '나, 지금 발 벗고 이직해야 하는 거 맞지?'라고 재차 물었다. 삼십 대가 되니 이직이 쉽지 않다는 걸 알기에 스스로 망설임이라는 감정을 사전에 차단하고 싶었는데, 남들에게는 자랑으로 느껴졌는지 반응이 시원찮았다.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다음날이 어버이날이었고, 아빠한테 자랑할 게 하나 생겼으니까. 고향에 내려가서 가족들에게 이런저런 얘기를 하니 역시나 반응이 좋았다. 작년 청와대 행사를 치르고 왔을 때만큼은 아니지만 아빠의 어깨가 으쓱했다.


이직이 잦은 업계다. 현재 연봉도 친구들에 비해 한참 낮다. 어느 날 하늘에서 사다리가 내려온 기분이었다. 동종업계 사세 확장으로 나를 꼭 모셔간다고 하니, 그래도 여태 허투루 살아온 게 아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정말 정말 우습게도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너무 바빠서' 면접을 보러 갈 시간이 없었다. 인생은 타이밍이라고 했나. 사무실에서 한 달에도 몇 번씩 울화가 불쑥불쑥 치밀어 이직 생각에 밤을 새워 이력서를 쓰던 때 연락이 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너무 바빠서 면접  시간도 없었다는  거짓말이 아니었다. 작년 대비 과장-대리급 절반이 퇴사해서 간단한 사무업무를 하는 데도 손이 모자랐다. 어느 대행사는 최근에 사람이 없어서 망했다고도 하던데,  업계에  정도(5~6 ) 사람이 없다는  크게 실감이 났다. 어쨌든 이직 고민을 하던  주에는 아르바이트생  명을 뽑아 함께 일하고 있었다.  주까지 마감해야 하는 중요한 서류 작업이 산더미처럼 쌓여서 끊임없이 나를 재촉했다.  직원이 모두 쉬는 샌드위치 휴일에도 아침부터 출근해서 이사님과 경쟁 PT 준비를 하고, 알바몬을 뒤져 전화를 돌렸다. 나보다 어린 이십  친구들은 예의 없게 전화를 받거나 전날 새벽에  가겠다고 문자를  남겼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삼십  중후반 분들은 눈치껏 일을 대충 하거나, 어린 내가 이래라저래라 하는  싫다티를 냈다.


아르바이트로 어떻게 모든 일처리를 하겠어. 아홉 시부터 여섯 시 혹은 한두 시간이 넘는 퇴근시간까지 쉬지 않고 일을 했다. 화장실에 가거나 담배 피우러 가는 시간을 빼고는 전화도 타이핑도 쉼 없이 했다. 잠이 부족하고 피로하면 몸은 더 애연가가 된다. 벤츠에 시동을 걸며 회사를 나서던 대표님은 내게 담배를 좀 줄이라고 했다. 왔다 갔다 하며 버려지는 시간이 너무 많다고 했다.


아, 자극이 너무 많다.


신경성 위염 때문에 엽떡도 마라탕도 끊었건만. 삶은 지치지도 않고 끊임없이 내게 자극을 준다. 더 멋지게 이번 프로젝트를 끝내야지! 똑똑한 아르바이트생을 잘 뽑아서 일도 더 잘 시켜야지! 효율적으로 일처리를 해야지! 스카우트 요청이 왔으면, 발 벗고 면접을 보러 가야지! 연봉을 높일 궁리를 해야지!


금요일 아침에 아르바이트생  명이 각자 다른 이유로 문자메시지를 남기고 출근을 하지 않았다. 하루 안에 처리해야 하는 일이  배로 불었다. 인사담당자는 오전까지 면접 의사를 보내라고 문자로 독촉을 했다. 그의 출근시간에 맞춰 전화를 걸어 면접을 보지 않겠다고 했다.  현재 연봉을 듣고 '거짓말 아니죠?', '잘못 쓰신  알았어요'라며 너스레를 떨던 인사담당자의 목소리와 '무조건 몸값 먼저 올려!'라고  어깨를 활짝 펴며 웃던 아빠의 모습과, 사전에  회사 서칭을 하고 팁을 줬던 친구의 카톡 메시지가 머릿속에 뒤엉켰지만, 확실하게 거절 의사를 지르고 나니 속이 시원했다. 사실 그 회사는 고층빌딩 30층에 위치하고 있었고 난 고층을 무서워한다. 애써 극복하려던 불안이 스르르 나았다.


사무실에 들어오니 아르바이트생들이 앉던 자리가 텅 비었는데 이상하게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건 체념의 감정일까, 아니면 누굴 시시각각 체크하고 독촉하지 않아도 되어서일까?" 후임에게 물어보니 "둘 다 아닐까요?"라고 답한다.


야근이 빤히 정해진 그날, 후임과 점심을 먹으며 모든 일을 털어놓고 디카페인 아메리카노를 쪽쪽 빨며 회사로 돌아오는 길에 이런 얘길 했다. "난 나한테 그냥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냥 마음이 평온-하게. 수평선처럼. 아 그냥 다음 생에는 자가 되고 싶다" 후임은 자가 되고 싶다는 표현은 처음이라고 웃음을 터뜨렸다.


진심이었다. 날 고민에 빠지게 하는 이직 제안도, 솔깃하지만 번거로운 모임 제의도, 새로운 만남도, 도전도 그 무엇도 나를 자극하지 않는 상태가 무지하게 고프다. "그래, 꼭 자를 주제로 글을 써볼게"라고 대답하고 며칠을 되새기다 글을 쓴다. 근데 요 며칠 되고 싶은 게 하나 더 생겨버렸다. 그건 바로 '진공 포장된 수비드 닭가슴살'. 얼마나 자극 없이 부드럽고 담백할까.


또다시 달갑지 않은 월요일이 다가오지만 언제나 곁에서 맘을 편안하게 해주는 후임에게 어떻게 나의 새로운 생각을 말할지 혼자서 쿡쿡대는 일요일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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