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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마추어리 Mar 30. 2023

[낙원] 식물을 키우는 이유

식물을 키우는 이유는  꽃피우는 방법을 알자는 거지

죽지 않는 방법은

낙원으로 가는 것


완벽한

볕과 물과 바람을

이태리 토분에 섞어두고

베란다에 앉아

부지런하게 들여다보는 것


조화만큼 아름다운 것이 있나요

손길 한 번 없이도

상처 없이 빛깔을 낸다니요


죽은 소리 하지 마라


식물을 키우는 이유는

꽃 피우는 방법을 알자는 거지


자꾸 더운 이 사막을

갈증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이유도

꽃 피는 걸 배우자고 그러는 거지



학수고대하던 시절이다. 지난가을, 꽃이 지는 자리를 부지런히 걸어다니며 그 광경을 저용량 배터리에 담을 때엔 올봄을 그렇게나 기다렸다. 모기차 뒤꽁무니만 보고 그 부연 소독약 속을 좋다고 뛰어다니던 어린 시절처럼, 삭막한 도심 속 가로수를 따라 두 시간은 거뜬히도 걸었었다. 벚꽃이 피다 못해 만발한 지금은 허나 웃기게도 발이 묶여 있다. 한 계절 만에 취미가 시들 수 있는 건가. 이제는 늘 누굴 기다린다고 아스팔트 위를 배회하는 내 모습이 지겹다.


"꼭 만나서 같이 버스를 타고 퇴근하는 거야"

먼저 제안한 것도, 덜 고생하는 것도 내가 먼저였는데 이골도 내가 먼저 나버렸다. 아마도 배가 부른 탓이겠지. 올봄의 마음은 미세먼지처럼 알 수 없고 지독하다.


회사의 사정이 좋지 않고, 결혼 준비로 생각할 게 많아지면서 스트레스 수치가 최대를 찍었던 적이 있었다. 나는 욕을 할 줄 알아서 화가 날 때면 혼자서 몇 번 뱉곤 하는데, 그러면 속이 좀 나아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엔 욕설이 아니라 더 무서운 말들을 했다. 죽고 싶어, 우울해, 내 존재의 의미는 뭐니? 등등.


말에도 독성이 있어서 하고 나면 신체의 어딘가에 묻는 모양이다. 뱉어내자마자 이러면 안 되는데, 하고 머리를 몇 차례 때렸다. 잠깐 머물다 갈 우울감을 또 마음속 보석으로 만들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실수를 하고 만 거다. 역시 부정적인 말은 마음을 파고들어서 혹시 우울증을 진단받으면 어쩌지, 충동적이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면 어쩌지 하는 우려로까지 번졌다. 그렇지만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은 오히려 건강한 사람이라는 걸 안다. 봄바람에 싱숭생숭해진 마음과 계절성 무기력을 떨쳐내기 위해 식집사의 길에 들어섰다.


기왕 키우는 거 제대로 키워보자 싶어 식집사들이 모인 커뮤니티를 열심히 들여다 봤다. 제때 물만 주면 되는 줄 알았는데 웬걸. 햇볕과 바람도 늘 충분하게 줘야 해서 고가의 식물등도 팔고, 식물 전용 서큘레이터도 있으면 좋단다. 물도 식물마다 필요한 양이 달라서 아침저녁으로 확인해야 하는데 많이 주면 과습으로 죽어버리고 적게 주면 말라서 죽는다. 화분에도 종류가 여럿 있는데, 공기가 잘 통하는 토분이 인기가 많고 개중에도 이태리에서 만든 것이 제일이란다. '반려식물'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땐 유난이다 싶었는데, 반려동물 키우는 것 만큼이나 복잡했다. 이 작은 생명도 살아있으려면 이렇게나 많은 손을 타야 하는구나. 하물며 자신의 생명은 얼마나 정성껏 돌봐야 하랴. 스스로를 들여다보고, 우울하면 나가서 햇볕도 쬐어보고 바람도 쐬어줘야 했건만 셀 수 없이 미안한 감정들이 스쳐 지나갔다.


나만큼 예민한 유칼립투스를 비롯한 총 6종의 화분을 아침저녁으로 바라본다. 특히 레위시아는 꽃이 예뻐서 사 왔는데, 잎이 아사 직전이었다. 알고 보니 다육과였던 이 아이를 살리기 위해 꽃대를 전부 쳐버리고, 분갈이를 하고, 영양제를 줬다 뺐다 했다. 그리고 이제는 새로운 꽃대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죽어가는 애를 데려와서 잎을 살렸다가, 꽃을 다 죽였다가, 다시 꽃대를 살려냈어"

죽을 것 같다가 살 것 같다가 하는 게 인생 아니던가. 지랄 맞은 유칼립투스를 나 보듯이 키우겠다고 들여놓고 거실에 대자로 누워 같이 햇볕을 쬐던 지난날들의 생각은 틀린 게 아니었다. 주먹만한 화분 속에서 말도 없이 숨만 쉬는 식물... 눈요기로 보기만 하는 사람은 절대 모를 무궁무진한 삶의 의지를 날마다 배우는 중이다. 하기사 내가 애가 있어, 강아지나 고양이가 있어... 생명을 키우다 보니 절절히 느껴진다. 나라는 생명에도 얼마나 많은 관심과 손길이 필요했는지를.


<눈물겨운 레위시아의 생명 분투기>


지난주에는 활짝 핀 꽃보다 봉오리가 그렇게 예뻐 보이더니, 오늘은 조금은 상처 난 우리 집 1호 식물 여인초가 얼른 보고 싶다. 오늘 집 가는 길에는 다시 꿋꿋하게 꽃구경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그를 기다려야지. 우울한 마음이 가시는 것도, 진 꽃대가 다시 피는 것도 모두 기다려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누군가를 기다릴 때 왠지 초조하고 조급한 마음도 다 꽃이 피려고 간질간질한 거겠지. 그래, 나는 죽고 싶었던 게 아니라 살고 싶었던 거였겠지. 죽니 사니 하는 말들도 알고 보면 다 꽃 피우려고 하는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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