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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마추어리 Sep 20. 2023

[사랑은 이진법]유칼립투스, 너를 보내고

우리가 내가 아닌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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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도 두 개, 네 눈도 두 개

팔다리도 윗입술과 아랫입술도

숫자가 꼭 맞는 데 우리가 어떻게 다를 수 있겠어


안고 싶은 마음도, 헤어지기 싫은 마음도

다름이 없는데 왜 같은 게 아닌거지

또 나만 이해 안되지


0과 1밖에 안 쓰는 데 이름은 2진법

숫자가 두 개라서 2진법


하나가 되고 싶었던 마음이

종국엔 0이 되어 버리는 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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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유칼립투스 구니를 초록별로 보내줬다. 구니는 내가 직접 데려온 첫 번째 식물이다. 여러번 소개한 바 있지만 키우기 까다롭다는 조언을 듣고도 들여온 친구다. '나도 지랄맞으니까 나를 보는 마음으로 길러내야지'하고 데려왔는데 6개월만에 잎 끝까지 모조리 말라버렸다. 가을볕이 너무 셌는지, 분무를 과하게 해주었는지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풍겨내는 유칼립투스의 마지막 향기가 짙어져 남편의 '제발 치워달라'는 요청이 왔다. 9월의 시작부터 말라 비틀어가는 걸 발견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냥 두었다. 덧붙여 여름, 그것도 가을로 가는 땡볕의 초가을 계절에 가장 컨디션이 나빠지는 내 자신과 또 한번 닮아있지 않은가. 나는 자랑처럼 바삭하게 마른 구니의 잎을 찍어서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업로드하고 있었다.


휴직의 한 가운데서 신경정신과를 찾았다. 선생님께는 '공황 숙련자'임을 자처했는데, 경미했던 분리불안이 갑자기 툭 튀어나와서 간만에 깊은 이야기를 나눴다. 여러 병원을 옮겨다니며 상담 진행 수준이 깨나 진행됐던 지라 어릴적 가정상황과 애착에 관해 지금 선생님과 얘기를 나눠 본 적 없었지만 오늘은 기어코 또 한번 자기소개를 해야 하는 시간이 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겪은 부모님의 이혼,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형제들과 의기투합하여 살아왔다는 이야기. 구구절절, 굳이 뱉어내고 돌아온 답은 '퇴행'이었다. 나는 선생님들이 족집게 점술사처럼 내 생각을 맞힐 때가 좋다. 박수를 치며 "맞아요! 유아퇴행! 제 남자친구가 저보고 5살같다고 했어요!"라고 외쳤다(쓸데없이 발랄한 이 성격이 그나마 내 인생을 유쾌하게 만들어주고 있으니 웃기셔도 너그러이 이해해주시기 바란다). 돌아온 선생님의 반응은 고개를 절레절레.


"은경님은 0세 수준의 아이입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간직하고 있는 하나의 따뜻한 품이 있어요. 대표적으로는 엄마고, 대부분은 엄마죠. 필요한 시기에 충족되지 못한 사랑은, 슬프지만 그 시기가 지나면 절대 채워질 수 없어요.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 엄마가 돌아와 보살펴주지 않는 이상은요. 남자친구는 절대 그걸 해결해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0세 아이는 부모와 나를 동일시하고,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을 늘 전제로 하죠. 나는 나, 너는 너. 은경님도 이제 성인이니, 평생 그걸 채울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이고 단념하고 사셔야 합니다."


퇴행이라니. 어느정도 직감은 하고 있었지만 5세도 아니고, 0세라니! 상담을 마치고 남자친구에게 이 얘길 전하니 통쾌하게도 웃었다. "갓난아기라는 거잖아!" 그동안 묵은 힘듦이 싹 내려가는 기분이라고 했다. 에라이. 해맑은 자식. 내가 너에게 얼마나 많은 짐을 지웠는지도 모르고 바보같이.


어느 커플에게나, 부부에게나 자신의 연인이 최고인 이유는 있을 것이다. 이 사람이어야만 했던 이유 혹은 끝내 이 사람을 택한 이유. 내게는 남편의 다정함과 자상함(이라고 쓰고, 부탁하는 일이면 뭐든지 다 해주는 엄마같은 부분)이 1순위였다. 그렇기 때문에 남편에게 (사랑이 변하지 않았다면) 계속해서 커지는 나의 응석을 받아달라는 폭력을 가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2주 휴직 사건을 떠올려보면 남편 뿐만 아니라 남편을 둘러싼 모든 라이프스타일에 대해서도. 마치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연약한 모습을 하고 엄마의 모든 인생을 통째로 흔드는 정말 '갓난아기'처럼.


구니를 보내고 병원에서 돌아온 날. 자꾸만 이런 말이 번갈아가며 머리에 맴돌았다.

"내가 어떻게 네가 될 수 있겠니. 네가 어떻게 내가 될 수 있겠니"


그래, 내가 예뻐하고 좋아한다고 유칼립투스 나무가 어떻게 내가 될 수 있었을까. 내가 두 발가락을 쫙 펴고 토분속에 웅크린다고 해서 흙 속의 양분을 빨아들여 살 수도 없다. 하물며 사람은. 나의 온 양심을 버리고 이기가 하늘을 찔러 설사 남자친구를 내 인생의 노예로, 아예 샷다맨으로 만든다 한들 정녕 한 몸이나 될 수 있는가. 그가 이런 글을 쓰고 책도 만들고 볼일도 앉아서 보고 우리 아빠한테 아빠라고 부를 수나 있나. 내가 턱걸이를 10개씩 하고 매 끼니 채소도 안 먹고 세상의 전자기기란 기기는 다 욀 수 있는가. 아니, 모두 차치하고 그가 걸어온 인생의 풍파를 1/10이나 감내할 수 있을까.


좋아하는 대상과의 분리. <적절한 거리를 둔다>라는 책의 제목처럼 나는 그걸 못하고 있었다. "퇴행했으니 다시 성장을 하면 되는 건가요?"라고 물었다.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그냥 위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된다는 식으로 얘기해주셨다. 이게 무슨 '제로부터 시작하는~~'같은 라이트노벨 제목도 아니고. 서로 하나가 되기 위해서 키워온 사랑이 종국에는 나를 0으로 만들어버리다니. 1이 아니면 0이 되어버리는 이진법 세상도 아니고. 그래, 차라리 모바일 게임 캐릭터로 태어나서 뇌도 해마도 전두엽도 없이 단순한 도트로나 움직이는 게 나았을 수도.


내 인생 진짜 가지가지 한다 싶다가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도 울상으로 들어가니 선생님은 이번에도 가벼운 우울증약을 처방해주셨다. 하루간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아무래도 우울증약에는 손을 대지 않아야겠다(이전에도 손 대지 않고 이겨낸 이력이 있어 벌써 말 안듣기로는 2회차이다).


어떻게 하면 덜 사랑할 수 있을지. 이게 틀린 방법임은 알지만 이제 그의 단점을 미워해보기도 하고 같이 있는 것의 불편함을 느껴보기도 하고, 무한한 사랑과 애착이 아니라 '인간'적인 감정을 품어보기로 한다. 내 사랑이 누군가에게 괴로움이 되는 것은 싫다. 어느 작가 말대로 '누구나 엉망진창의 자기 자신을 끌어 안고 멀쩡한 척, 어른인 척 한 세상 살아가는 게 인생'이니까. 0세부터 시작하는 어른되기 분투기. 오늘부터 다시 시작이다. 유칼립투스, 너를 보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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