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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마추어리 Jan 29. 2023

새 신발은 쉽게 오지 않는다

신년에 새 사람이 되어버린 건에 대하여

새 신발은 쉽게 오지 않는다


가난한 유전자는 알고 있다

새 신발은 쉽게 오지 않는다는 것을


그건 여러 번의 망신과

수십 번의 투정을 거쳐

수백 번의 타이밍을 계산해야

가질 수 있는 삶의 구제


그렇게 낡은 뒤축은

신발가게에 내빌어버리고

의기양양하지만 어기적 어기적 걸으면


아, 사람에게 새 영혼이 깃드는 일은

얼마나 쉬운 것인가

하고 탄식하게 되는 것이다


나중에


마데카솔을 복숭아뼈까지 바르던 밤과

아예 뒤꿈치가 없는 신을 사는 법

신발장에 신발을 많이 넣는 법을

알고 난 뒤에는


수없이 이별한 해진 편안함을 떠올리며

현관 거울 앞에 홀로 서서 계산해 보는 것이다


아, 한 영혼이 가는 길엔

얼마나 많은 새 마음이 필요한지에 대하여



지난 연말부터 해서 가는 곳마다 큰 토끼 조형물이 보였다. JUMP UP 2023!이라는 텍스트도 빼놓지 않고. 평소의 나라면 "뭐가 점프인데?"하고 비아냥대는 게 어울렸겠다. 다만 올해는 좀 달랐다. 진짜 여러 가지 방면에서 막 JUMP UP!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온 세상이 나를 구름 위까지 둥둥 띄워주는 기분이 들었다.


시와 글을 쓰지 못한 지난 몇 개월 동안 회사에서는 능력이 다한 팀장님을 보내야 하는 일이 있었다. 내 능력이 커지면서 팀장님이 물러나야 하는 상황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했다. 그럼에도 나는 그녀를 보내는 자리에서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물었다. 팀원으로 일하기엔 너무 답답한데, 총괄하는 일을 하기엔 너무 버겁다고. 내가 그녀에게 갖는 애증만큼이나 나에게 많은 감정을 가졌을 그녀는 울지도 않고 격려의 말을 해주었다. 사람의 성장도 계단식이라고, 네가 지금 그 지점에 있을 뿐이라고, 힘들어도 위를 보고 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회사뿐만이랴, 밖에서는 더 큰일이 진행되었다. 지난 8년간 장난처럼 말했던 결혼을 순식간에 추진했다. 18평 임대 아파트 당첨, 예식장 계약, 프러포즈(받아내기), 혼인신고, 신혼집 입주, 인테리어와 랜선집들이까지.

결혼을 결심하는 마음이야 어렵지 않았다. 물론 8년간 친구처럼 지냈던 것과는 다르게 남자친구를 대해야 하는 것, 둘 다 좀 더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 양가 부모님을 존중하고 처제와 시누이라는 호칭을 써야 하는 것쯤은 괜찮았다. 다만 내게 가장 큰 심경의 변화를 가져다준 것은 '집'이었다.


하필이면 아파트 꼭대기층을 뽑은 남자친구의 엄청난 행운 덕분에 내 불안 요소는 가중되었다(동호수 추첨 이후 불안 때문에 얼마나 맘고생을 했는지 적으려다가 증상이 나타날 뻔해서 약을 하나 삼키고 이 부분은 생략하기로 한다). 설렘으로 들뜬 남자친구의 마음을 해칠 수 없고, 또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어서 사전점검과 입주청소를 거쳐 이사를 하고 인테리어까지 마쳤다. 다행히도 엄청 빠른 엘리베이터와, 환상적인 서향 노을뷰와, 오는 설치 기사님들마다 보내주는 칭찬세례 덕분에 아직까지 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방금 전이 지금까지 중 가장 큰 일이었다). 신기하게도 아무렇지 않은 척 행동하면 마음도 아무렇지 않아졌다. 그래서 갑자기 너무 좋은 집으로 와버린 것도, 경쟁PT에서 쓴 소리를 직접 듣는 것도 아무렇지 않은 척 했다.


전에 살던 집은 구축 빌라 2층이었다. 안방 창문을 열면 절간 같은 요양원과 높은 교회가 떡하니 서 있었다. 그 틈새에 1/5 정도는 하늘이 빼꼼 보였는데, 그마저도 전깃줄이 지나가서 모양새가 안 예뻤다. 그런데도 누워서 그 조그만 하늘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구름이 머리 위로 둥둥 떠갔다. 하늘과 구름의 아래에 있는 게 퍽 평화롭게 느껴졌다.


반면 이사 온 집에서 발코니 밖을 보고 있으면 구름이 옆으로 떠갔다. 이제 세상이 나를 감싸 안아주는 게 아니라, 시대를 관망하고 같이 걸어 나가야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봉긋한 동산 사이로 노을이 지면 하늘에는 검은색, 빨간색, 주황색, 노란색, 초록색, 하늘색이 공존했다. 마치 세상에 갑자기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처럼. 모든건 이렇게 그라데이션으로, 이 마음에서 저 마음으로 옮겨가면서, 혹은 공존하면서 진행된다는 것처럼.


불현듯 부랴부랴 변화를 준비하던 지난날들이 떠올랐다. 녹초가 되어 퇴근한 우리는 50L 쓰레기봉투에 지난 6년간의 살림을 모조리 쓸어 담았다. 낡고 해졌지만 편안한 것들, 혹은 편안하지만 낡고 해진 것들을 모두 버렸다. 여러 상황들이 내게 강요하는 듯한 '새로운 시작'에 걸맞게 가전도 가구도 모조리 바꿨다. 늘 출판사의 연락만 기다리며 만들어둔 브런치북을 없애버리고, 부크크 원고를 짜고 표지를 디자인해서 출판요청을 넣어버렸다. 경쟁 PT장에서 어려 보이면 안 된다는 대표의 말에 질려하면서도 좋아하는 색의 옷들을 버리고 취향이 아닌 재킷을 사 모았다. 남편은 기를 죽이면 안 된다는 유튜브를 보고 의식적으로 고맙다, 잘했다는 칭찬을 쏟아냈다. 갑자기 들이닥친 새로운 환경에 맞춰 갑자기 새로운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가 사라지는 걸 보고 있는데 마침 주문한 새 책꽂이와 담요가 도착했다. 남자친구는 새 담요를 꺼내서 새로 둘러주고 헌 담요를 가져갔다. 몇 년 동안 색이 잘 지워지지 않는 음식물을 흘리기도 하고, 난로에 타서 검은 자국이 남아서 새 집에 너무 안 어울리는 담요였다. 드디어 저 담요를 버릴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버리라는 말에 남자친구는 발끈했다.


  "이걸 왜 버려! 나 작은 방에서 컴퓨터 할 때 쓸 거야!"

통 물건을 버리지 않는 남자친구가 평소엔 미웠는데 갑자기 너무 친근하게 다가왔다. 꼭 모든 것들을 새것으로 바꾸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래, 그게 너다'라는 느낌이 들었다. 모든 상황과 환경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한 사람이 곁에 있었다. 이 모든 변화의 소용돌이도 실은 그로부터 시작된 것 아니었던가.


 담요를 두르고 보는 신혼집의 풍경에서, 나는 우리의 황혼을 상상했다. 그리고 결혼의 의미를 다시 생각했다. 새롭게 무언가를 시작하는 것은 같은 마지막을 맞자는 약속을 하는 일이라고. 남에게 보여줄  가구와  물건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답게 저물어갈 일에  마음을 쏟아야하는 일이라고.


덧붙여 어제는 이상한 강박에 꽂혀 아파트 커뮤니티에 랜선집들이 글을 올렸다. '나 이만큼 새 가구로 신혼집답게 꾸몄어요!'라고 마음의 숙제를 끝내버릴 요량이었다. 개중에 "12월에 입주했는데, 아직도 에어비앤비 와있는 느낌이 들어요"라는 댓글이 달려서 한참을 사랑스럽게 보고 있던 기억이 난다. 신혼부부 세대가 꽤나 있는 만큼 이런 변화의 시기를 지나는 사람이 나뿐만은 아니라는 위로가 크게 다가왔다. 그래, 그게 자연스러운거지.


그럼에도 여전히 내게 주어진 과제들에 여전히 정신이 없다. 이 글도 좀 더 다듬고 숙성하여 적으면 더 예뻤을 텐데 하는 욕심이 난다. 그래도 지금이 아니면 적을 수 없는 말들이 많아서 현관에 택배를 그대로 쌓아둔 채로 글을 쓴다. 그래, 이게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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