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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마추어리 Jan 01. 2023

[내가 로보트가 아닌 건에 대하여]

꿀렁이는 장기와 요동치는 감정을 붙들고 결혼준비를 하다가

내가 로보트가 아닌 건에 대하여


카페인과 유당을 먹지 못한다

좋아하는 음식을 먹고 탈이 나면

한가득 게워내고 누워

장기들이 내는 소리를 잠자코 듣는다

십이지장과 위와 췌장이 요란하다

뒤통수에서 쇳소리가 난다

나는 왜 로보트가 아닌가


소리치는 상사에게서 도망쳐

독한 담배로 분을 삭일 때에는

가래가 자동으로 끓고 자꾸만 기침이 난다

심장이 화로 요동친다

신경안정제를 먹는다

나는 왜 로보트가 아닌가


왜 취향과 별개인 장기를 돌봐야 하고

짜증을 내다가 기뻐도 하는가

감정적인가


살아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1. 인공지능(人工知能)에 대해 생각해 본다. AI는 인간이 가진 지적 능력을 컴퓨터를 통해 구현하는 기술이다. 다행히 SF영화에서 그토록 두려워하는 강 인공지능(사람처럼 자유로운 사고가 가능한 자아를 지닌 인공지능)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고 한다. 단, 알파고 같은 약 인공지능은 다양한 형태로 우리 곁에 존재하고 있다. 우습긴 해도 기계종업원이나 기가지니 같은 로봇들이 우리 삶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종종 시리가 "그런 말은 저를 상처받게 해요"처럼 인간이 입력해둔 멘트를 날리기도 하지만 그들은 전혀 타격을 입지 않는다. 해마도 없고 전두엽도 없는, 아직은 약 인공지능이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의 반대말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건 비인공지능일까? 아니면 신이 만든 신공지능일까? 아니면 창조론과 진화론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까? 굳이 인공지능과 인간지능을 비교해보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지능은 과연 얼마나 대단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겼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은 철저한 데이터와 냉철한 분석력으로 정확한 판단만을 한다.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효율적으로 문제를 처리한다. 문제처리능력에 따라 점수를 매길 수도 있다. 그에 반해 인간의 지능은 어떠한가. 감정에 대한 부분을 배제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어디까지 진보했는지, 그 가치와 효용성은 어디까지인지 가시적으로 판단하고 입증할 수 있는가?


2. 과학과 철학에 대한 공부가 시급한, 이런 일차원적 호기심은 시시하게도 아래 사건으로부터 발생했다. 예비신랑에게 '프러포즈의 중요성' 여러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식적인 어떤 절차가 필요하다는 나의 말을 지지리도  알아듣는 그에게 답답해서 이렇게 소리치고 말았다.

"그러니까, 인스타그램에 올릴 만한 날이 필요하다고!"

반지가 없어도 되고 호텔풍선이 없어도 되었다. 다만 작은 편지라도 몰래 쓰는 마음과 함께 조각케잌이라도 받았으면 싶었다.  말을  없어보이지만 효율적으로 축약해서 전달한  '인스타 스토리 '이었다.  또한 유튜브 알고리즘을 타고 올라오는 '프러포즈 브이로그' 보고 쌓은 일련의  안의 빅데이터였다.

물론 그도 알아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입에 올린 순간부터 폭풍검색이 시작됐단다. 무수히 올라오는 검색상위광고에는 반지, 장소대여, 이벤트 기획 등 다양한 업체가 즐비했을 거다. 남초 사이트에서 프러포즈를 안 하고도 잘만 산다는 글만 모아진 것을 읽기도 했단다.

사랑은 우리 둘이 했다. 그런데 결혼식도 아니고 프러포즈 하나 하는 것에도 결국 SNS와 남의 경험 데이터를 들먹이며 각자의 입장만 피력하기에 급급하다. 인간의 지능은 데이터와 인공지능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가. 디스토피아는 결코  곳에 있지 않다. 구글과 유튜브가 데이터를 기반으로 제공하는 안락한 사유가 가능한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과의 소통마저 단절되고 있다.  대단한 인공지능을 만들어낸 종족에 속한 나와 예비신랑의 인간지능은 얼마나 처참한 수준인가.


3. 그럼에도 서로가 생각하는 프러포즈의 중요성에 대한 간극을 알아차리고는 웃음과 농담이 섞인 얘기를 나누고 마무리했다. 그러고 나니 시간은 새벽  .  번도 제대로 소화된  없는 피자를 그가 잠들고 나서야 게워낸다. 요동치는 장기 위에 핫팩을 올려두고 꾸르륵 하는 소리를 듣는다. 언제 가빠질지 모르는 심장을 잠재우기 위해 공황장애약을 먹는다. 뒤통수에서 -하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난다. 사실 나는 로보트가 아닐까? 심장이 뛰는 것도 무섭고 인간의 음식도 소화할  없는 로보트. 그런데 장기가 다시 꿀렁한다. 아쉽게도 나는 사람이었다. 대자연에 포함되는, 수많은 세포로 구성된 연약한 동물에 불과했다.

드르렁 코를 골고 자는 예비신랑 옆에서 생각한다. 살아있다는  무엇인지. 내가 로보트였으면 서운할 일도 짜증  일도, 무언가를 바라는 일도 었을 테다. 해의 마지막 날이라고 그가 좋아하는 피자를 미련하게 우걱우걱 먹는 일도 없었을 테고 무엇보다 새벽까지 갑론을박하며 싸우지도 않았을 거다. 문득 중년의 여성이 주로 모인 커뮤니티에서  글이 생각난다. '내가 원하는 삶은 이번 생에 주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산다, 그러면 마음이 편해진다.' 바라는 마음은 무엇인가,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나, 살아있다는  과연 뭘까.


4. 얼마 전엔 아기 돌잔치를 앞두고 비로소 자부(자유부인) 타임을 갖기 시작한 언니를 만났다. 술을   걸치고 같이 택시를 탔는데, 결혼과 출산에 관한 얘기를 하다가 택시 기사님까지 가세해 한바탕 인생 담론이 펼쳐졌다. 결혼을 해야 어른이 되고, 거기서 아이를 낳아봐야 조금  어른이 된다는 얘기였다. 요즘 트렌드에는 전혀 안 맞는 말이었는데 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 생각의 방향이 많이 바뀌고 넓어진다고 했다. 불안장애로 혼자서 택시를 못타겠어서 기어코 예비신랑을 괴롭히려는  달래며 같이 택시를 타준 언니였다. 자부타임이라고는 하지만 자고 있는 남편과 아이의 모습을 CCTV 계속 들여다보면서도, 돌도 안된 딸내미보다 못한 나란 인간의 투정을 묵묵히 받아주는 그녀에게서 어른의 모습이 느껴졌다.   전까지만 해도 유치한 연애담과 맛집 얘기에 열중하던 우리였는데, 언니는 그새 혼자서 얼마큼 커진 걸까.


5. 싸움이 잦아질 것은 결혼을 결심했던 때부터 짐작했던 일이다. 내가 로보트가 아니라서 공교롭긴 하지만 이렇게 매일 서운함을 토로하고 오해를 푸는 과정에서 관계는  돈독해질 것이라 믿는다. 물론 모두가 그렇듯이  결혼은 남의 결혼과는 다르겠지만 나도 '살아보면', 그렇게 해서 조금이라도 언니처럼 커져보면 알게 되지 않을까. 로보트처럼 늘 평온한 마음은 못가져도, 살아있음으로써 가질 수 있는 어떤 가치가 있다는 것을. 그게 성장이든 관계든 마음의 유무든, 로보트나 인공지능이 되는 것보다 더 좋을 수 있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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