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마추어리 Apr 13. 2023

[아프리카 펜스] 아파트 숲을 짓는 코끼리라니

고층 아파트로 이사오니 다른 아파트 짓는 현장도 보이네요

아프리카 펜스


나 떠나지 못하는 걸 누가 알고

아프리카 한 토막을 옮겨두었나


청년주택 24층 베란다에서

재개발 구역 공사장을 본다


덤프트럭 모습을 한 코끼리가

느릿느릿 줄지어 걷다가

뿌우 소리를 낸다


흠뻑 흙샤워를 하고

무거워진 등으로 오도 가도 못하는

25톤 덤프트럭을 본다


자갈만한 인간이 어기적 걸어오고

덤프트럭은

조용하고 무성한 열대우림을 생각한다


그래, 만들어보는 거야

꿈에 그린, 높이 솟은 삶의 터전 말야


피로에 절어 입을 쫙쫙 벌리는 러시아워 속에서

인간 숲을 짓는 덤프트럭이 할 말을 생각한다


무성한 우림을 기다리며


그래도 그래도

펜스 안은 안전하다고



신축 탑층에 이사 오고 나서 아침이면 실외기실 문을 열고 바깥을 보며 바람을 쐰다. 맞은편에는 대단지 규모의 아파트를 짓는 펜스가 쳐 있고, 그 안이 훤히 보인다.

오늘도 출근하기 싫다는 말을 소처럼 되새김질하는데, 차라리 로봇이면 불쾌할 일 없이 출퇴근할 수 있을 텐데 라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일자리가 없어지나? 하지만 이미 나약해 빠져 버린 현대인이 감내하며 살기엔 비효율적인 것이 너무나 많다.

느닷없이 뿌우, 소리가 났다. 흙밭에 줄지어 선 덤프트럭이 코끼리처럼 생겼다. 아래 작은 25톤 트럭에는 기린 같은 포크레인이 쉴 새 없이 등에 흙을 가득 담았다. 무한도전에 나온 도토가 흙샤워를 즐기는 장면이 떠올랐다. 그런 코끼리를 중세엔 짐을 옮기는 데 활용했다고 했던가.

어느 다큐에서 길 잃은 코끼리에 관한 얘기를 본 적이 있다.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코끼리 떼는 쓰레기차가 오는 시간에 맞춰 쓰레기장으로 줄지어 들어갔다. 트럭이 음식물 쓰레기가 섞인 오물을 배출하고 가면 굶주린 코끼리들이 코 끝을 다쳐가며 먹을 걸 헤집어 찾아 먹는다. 오염된 도시의 배설 속에서 한때 영물로 여겨진 코끼리는 다양한 모습으로 죽는다. 죽어간다,라는 내용이었다.


지금도 코끼리 모습을 한 덤프트럭은 인간이 쾌적하고 영광스럽게 살 고층 아파트를 빽빽이 짓고 있다. 우리가 바라는 높고 무성한 우림은 하여간 그런 모양이다. 푸르지도 자연친화적이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그저 빽빽하고 높다는 것에만 비춰 숲이라고 칭해지는 괴랄한 형국이다.


오늘도 아파트 탑층에 살고 있는 게 적응이 안 돼서 공연히 박스 한 장을 들고 지하 분리수거장을 왔다 갔다 했다. 머리에 자꾸만 생기는 비듬은 두피 건선이라고, 건조한 신축 아파트 특히 고층에서 잘 생기는 것이라는 얘길 들었다. 가보지도 못한 아프리카의 코끼리를 걱정할 만큼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도 아니거니와 환경에 유난인 MZ는 더더욱 아니다(밀레니엄 세대는 맞다만).


다만 요즘의 시와 시상들을 보니 공통점이 있다. 차갑고 위선적인 도심생활에 환멸을 느낀다. 한 날은 술에 취해 야경을 바라보다가도 이내 식물을 하나라도 더 들여 초록잎을 닦기 바쁘다. 애초에 요 근래 술을 많이 찾은 것도 고층에의 불안을 잊고 싶어 그런 것 아니었던가. 완벽한 적응도, 꽉 찬 불만도 아닌 그 가운데 걸쳐서 하루씩 산다. 돌이켜보면 그래도 아무렇지 않은 척 번듯하게 살아 보이고 싶은 나도 위선자가 아닌가.


그래도 한 가지는 알고 간다. 언젠가는 투박한 1층 집에서 술도 약도 없이 9시에 잠드는 생활을 하고 싶다는 것. 그만큼 원체 촌스럽게 태어났는데 우연히 얻은 행운 속에서 졸부라도 된 듯 상념에 빠져 있다는 것. 또다시 주어진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부조리함에만 초점을 맞추고 살고 있었다는 것.


다만 자존감을 높이면 고층생활에도 우아하게 적응할 것이라는 시나리오는 틀렸다는 건 확실하다. 이래나 저래나 나의 행복은 소박한 것에서 오는 것 같다. 적당한 빈곤 속에서 또렷해지는 삶의 촉수가 때때로 그립다. 마켓컬리가 오는 시골집에 사는 그날까지 모쪼록 돈을 열심히 모아야겠다.

이전 16화 [사랑은 이진법]유칼립투스, 너를 보내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