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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마추어리 Sep 30. 2022

[육개장을 먹으며] 나로 태어나서 나로 떠나는 법

왜 나로 태어났지라는 물음에서, 어떻게 나로 떠날지를 생각한다.

육개장을 먹으며


모든 게 지루한 날에

밥알을 세면서 물었다

하고 많은 인간 중에

나는 왜 나로 태어났나요


인간들은 꼬박꼬박 밥을 씹으며

대답이 없었고

그저 입맛이 달아난 나는

애꿎은 뻘건 국물만 들척였다


불어 터진 쌀알 같은 얼굴이

낯익은 모습으로 모였다가 흩어졌다가

동시에 따끈해졌다


수저처럼 익숙하고

뚝배기처럼 은근한 질문과


누구나 생각하고

아무도 하지 않는 대답


국물은 왜 빨개서

이토록 하얀 사람들을

삼시세끼 부끄럽게 하는가


하고 많은 할 것 중에

나는 왜 살아있는가


나를 기억하는 사람마다

육개장 한 그릇씩 남겨두고

하고 많은 사람 중에

나는 무엇으로 가는가



살인적인 스케줄 속 볼일 보듯 식사를 하는데 불현듯 메뉴가 신경 쓰였다. 가을 초입, 팀장님은 따끈한 국물이 당겼고 후임은 든든한 밥이 당겼을 테다. 다음 미팅 장소로 넘어가기 전 캄캄한 종로 일대를 걷다가 프랜차이즈 육개장 집엘 들어갔다. 어떻게 살아있는지 신기할 정도로 잠을 자지 않는 클라이언트와, 그를 위해 하루하루 열심히도 사는 우리들과 그 앞에 놓인 육개장이 그날엔 참 웃겼다.


인생에서 가장 못생긴 시기가 중학교 2학년이라 했던가. 그때 나는 새로운 친구들과 어울리며 외모에 관심이 많아졌는데, 언젠가부터는 이름도 모르는 학우들도 모자라 길가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 생김새를 관찰했다. 그런데 웬걸, 나보다 눈이 작든 피부가 안 좋든 누구나 얼굴에 매력이 철철 흘러넘치는 것 아니겠는가. 지금도 또렷이 생각날 정도로 "나는 내 얼굴만 아니면 돼.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내 얼굴이랑 바꿔줬으면 좋겠다"라는 말을 많이도 하고 다녔다. 나는 나만 아니면 돼, 이 얼마나 자기 비하의 끝판인가.


그러고도 얼굴에 칼 한번 안 대고 31세까지 살아온 지금, 요즘의 나는 영 다른 생각을 한다. 세상 찌든 눈을 하고 광화문 한 복판을 지나는 저들과 나는 도대체 뭐가 다른가. 소싯적 소원처럼 이 얼굴과 저 얼굴을 바꿔 낀다고 해도 인생의 1%도 달라질 것 같지 않다. 얼굴뿐이랴, 손이든 발이든 아예 육체가 바뀐다 한들 달라질 건 없다. 오히려 직업이나 부모가 달라진다면 몰라도.


아마 나는 요즘 개성이나 취향 같은 것을 탐구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아님 영혼이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에 대한 연구를 하고 싶은 건가. 좀처럼 '너나 나나'에서 벗어나기 힘든 요즘 무얼 해야 내가 나다울 수 있을지 해답이 떠오르지 않는 날들이었다. 회사에선 과장이라는 이름으로, 집에선 게임 닉네임과 레벨로 살기를 수년째, 도대체 집으로 돌아가는 나는 어떤 이름을 가진 사람이냐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거꾸로 생각해보기로 한다. 막 태어나 솜털도 굵어질 생각도 않던 중학교 2학년 시절, 분명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아의 탄생과 존재 이유에 대해 사춘기스러운 고민을 했을 테다. 이제는 죽음으로부터 생각해본다. 기계처럼 치러지는 장례식 속에 나는 어떤 사람으로 떠날 '수' 있는가. 똑같은 브랜드 옷을 입고 똑같은(일 하기 싫다라는) 생각을 하고, 똑같이 걸어가는 이들 속에서 감히 나는 다르게 살다 갔다고 말할 수 있을까.


버스에서 좋아하는 노래가 나왔다. . 역시. 세상은  이렇게 내가 등지기 직전에  번씩 친근한 태도로 말을 건다.  곡이었으면 그저 운이 좋은 날이군, 하고 말았을 텐데  좋아하는 곡이 이어서 흘러나온다. 좀처럼 신곡을 찾아 듣지도 않고 음악 감상은 오로지 한곡 반복하는 습관임을 따져보니 문득 생각이 분명해졌다. 그래, 오늘의  행운을 나는 운명이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다지 마이너한 곡들도 아니었다. 하나는 리메이크 곡이고 하나는 드라마 OST였다. 그럼에도 기분 좋게 멜로디에 귀 기울이는 내 모습이 멍하니 버스에 앉아 있는 이들과 확연히 다르게 느껴졌다. '마침내' 나로 사는 기분이 들고 마음이 편하게 먹어졌다. 그리고 아주 사랑스러운 다짐을 했다. 앞으로는 좋아하는 노래를 더 더 많이 만들어야지. 그래서 좀 더 기분 좋게 세상을 살아야지.


결혼식도 그렇지만 요즘엔 장례식도 무겁지 않고 독특하게 치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애초에 살아있을 때 지인들을 불러 미리 마지막 시간을 보낸다거나, 생전에 좋아했던 노래 한 곡 틀어두고 그저 즐기다 가라고 주문하는 장면은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종종 만난 바 있다.


내가 나인 것이 싫었다가도, 오롯이 그저 나이기를 바라는 나. 이렇게 나라는 존재를 생각하며 몇 시절을 뒤척이다 보면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오지 않을까. 온갖 스타일과 취향이 딱딱하게 굳어져서 물구나무를 서고 봐도 '쟤는 쟤'라는 말을 들을 날이. 주름 사이사이마다 살면서 펼쳐온 자기주장이 고스란히 박혀 운 한번 안 떼고 얼굴만 스쳐 봐도 너의 인생을 알겠노라고 하는 날이.


하여간 내가 준비할 육개장은 나만의 맛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 날이다. 어차피 남들 다 쓰는 상조회사에서 준비한 미지근한 국물이라 해도, 그 자리에서 울든 웃든 나라는 사람의 영혼과의 기억이 녹진하게 스며든 그런 맛을 준비하고 싶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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