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마추어리 Aug 15. 2022

[연필을 깎는 것처럼] 사람을 고쳐 쓸 수는 없어도

커터칼은 정말이지 작고 우습지만

연필을 깎는 것처럼


우리 한 번

연필을 깎는 것처럼 살아볼까요


날카로워 작은 마찰에도 틱틱대는,

둥글둥글 곰처럼 무뎌 답답한,

부러지고 꺾여 상처 같은 모양을 내는

것들


남이 쥐는 대로 움직여도

제 뜻이 있겠지요

저마다 흑심이 있겠지요


다만 내가 할 일은

연필깎이로 돌려 깎아

같은 모양을 만들기보다

커터칼로 오른쪽 왼쪽

조금씩 교정해주는 것


그렇게 한 자루씩 다듬어

한 편 써보면 알겠지요


그 모든 난리법석들이

저마다 고유한

이야기가 되었다는 것을요


사람은 고쳐서 쓰는  아니라는 말에 통감한다. 7년을 만난 애인이 아니라, 내뜻대로 되지 않는 부하직원의 태도가 아니라 나로부터 다시 생각한다. 30 년을 살며 단단하게 고집과 좀처럼 놀러 나가지 않는 돌과 같은 팔다리. 그래도 커터칼이 연필의 모양새를 다듬을  있는 것처럼 사람이 연필이라면 나도 누군가가 나서야 바뀔  있지 않을까. 지금껏 이게 내 개성이라며 우기듯 살아왔는데 변화하고 싶은 마음이 늘 한 구석에 있었나보다. 그렇다면 나는 타인들을 원망하면서 살아도 되는 건가.


그러나 커터칼의 입장이라고 단단한 타인의 심지를 바꾸는 것은 쉽지 않다. 아니, 애초의 그의 마음이 흑심인지 아닌지도 헤아리기 힘들다. 받아들이기 괴로운 타인의 행동을 마주할 때마다, 그저 '일부러 그러는 것은 아니겠지'하며 그가 흑심을 품은 것만은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특히 직장에서 자주 그렇다. 아주 평범한 소시민인 나는 일종의 계략이나 정치질을 접할 곳이 회사뿐이다. 누가 봐도 속이 시커먼 호사가가 있는 반면, 충성스러워 보이는데도 하는 일마다 속을 뒤집어 놓는 부하직원도 있다. 그럴 때마다 고민에 빠진다. 이 아이를 데려다 먼저 허심탄회하게 왜 그러느냐고 물어볼까, 아니면 꼰대 발언으로 무장해 겁이라도 줘볼까. 결국에는 아무 조치도 취하지 못하고 혼자 속으로만 삭히고 만다.


직급이 오르고 그런 일을 몇 번을 거듭하고 나서야 비로소  이런 스트레스로부터 해방되는 법을 알았다. 애초에 내가 다그치거나 어떤 액션을 취한다고 해서 바꿀 수 있는 건 없었다. 커터칼은 정말이지 작고 우습다. 제법 날카로워 작은 상처나 피를 보게 할 순 있어도 치명타를 날릴 권한은 없다. 이름만 칼자루인 빛 좋은 개살구랄까. 작은 회사에서 중간관리자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내 처지가 그렇다.


다만 커터칼에게는 작은 힘이 하나 있다. 한 손에 쥐어지기에 날을 각도별로 섬세하게 조작할 수 있다. 연필이 뭉툭하면 마치 시원한 데를 긁어주듯 얇고 깨끗하게 단면을 도려낸다. 박피한 듯 지저분했던 표면이 금세 깨끗한 나무색을 드러낸다. 닳고 닳아 고장 난 듯 어떤 글도 못써내던 연필을 조금씩 교정해간다. 이렇게 해보면 어때, 저렇게 해보면 어때, 하고 조언해주듯 그렇게 흑심의 끝을 어르고 달래서 결국에는 제 역할을 하게 한다.


우리들 작은 직장인의 삶이 이렇게 우습고 사랑스럽다. 대검을 빼어 들고 나라를 지킨 이들의 위인전을 보고 자라,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우뚝 선 서울의 한가운데로 출근한다. 그리고 커터칼 하나를 쥐고 쓱싹쓱싹, 똑같이 자란 사람들과 삐졌다가 조우했다가 합심해서 일하고 살아간다.


퇴근할 때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상념에 빠질 때가 많다. 새 단장했다는 광화문 광장을 지나면서 목이 아플 만큼 고개를 들어 동상을 본다. 이순신 장군처럼 용맹하게, 세종대왕처럼 뾰족한 글을 지어내서 저만큼 위대한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가방 바닥에 연필 한 자루가 도로록 굴러간다. 그래 봐야 그런 칼질을 하고 그런 글이나 쓰는 연필 한 자루지만 그래도 내 얘기를 써가고 있지 않은가. 그런 생각을 하니 함께 광화문 광장을 걷는 수많은 사람들과 푸른 하늘이 눈에 찬다. 얇고 오래, 저마다 써가는 우리들의 이야기도 충분히 광활하다. 대단하다.

이전 21화 [육개장을 먹으며] 나로 태어나서 나로 떠나는 법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