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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마추어리 Feb 18. 2023

[잡채 그 잡채] 잡채에 대한 단상

양파도 볶고 시금치도 볶아야 하는데 당근만 볶았어요.

잡채 그 잡채


누구는 싫다는 당근을

누구는 골라내는 시금치를

혼자서 달달 볶는다


단내가 날 때까지

종아리 저려올 때까지

지지고 볶는 나만의 싸움


색이 예쁜 재료를

뒤죽박죽 섞어버린다


꼭 한 가지 색만 먹으면 안 되는 것처럼

길쭉한 것이 서로 엉겨 붙어서

지긋지긋한 한 개로 만들어버린다


당면처럼 끈질긴 마음으로

참기름 훌훌 둘러 완성하면


겨우 한 그릇이다.

그 많은 게 겨우 한 그릇이다




나는 잡채를 별로 안 좋아하기 때문에 어떤 게 맛있는 잡채인지 모른다. 어릴 적 집에서 먹었던 잡채는 간이 세지 않고 참기름 맛이 많이 나지도 않는데 너무나 기름져서 싫어했다. 점심식사를 중국집에서 할 때는 잡채밥이 요일메뉴인 날이 어찌나 많은지 상사를 따라 잡채밥을 먹기도 했다. 중국집이라 그런지 간이 세고 후추 맛으로 먹었는데 시키는 날마다 맛이 달라서 어떤 걸 기준으로 잡아야 할지 늘 헷갈렸다. 상사는 그 집에 갈 때마다 "여기 주방장 또 바뀌었네"라고 큰 소리로 아는 척을 했다. 일주일에 두 번 가는 때도 있었는데 무슨 말을 저렇게 할까 생각해보기도 했는데 그냥 주인장 들으라고 하는 소리였던 것 같다.


별의별 것을 다 넣어서 '잡', 재료를 채 썰어 넣어서 '채'. 아마도 그럴 것이다. 기분이 잡칠 때 그리고 '자체'라는 말을 쓸 때 줄곧 잡채라는 말을 쓴다. 전자는 구세대 용어고 후자가 신세대 용어다. 어느 날은 겨우 2살 정도 많은 학교 선배들을 만났는데, 회사에서 도대체 '그 잡채'가 뭐냐고 여러 번 물어보고 이해시키려는 대화를 오래 했다고 한다. 나도 M세대의 어디쯤에 속하는 나이지만 Z세대가 만들어내는 신조어에서는 도무지 어떠한 연계성이나 의미를 찾기가 어렵다. 단지 발음이 비슷해서 잡채라니... 신세대들의 국어 실력 논란의 또 다른 방증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다.


즐겨 보는 유튜브 채널 '빠더너스'의 콘텐츠는 전부 다 재미있는데, 요새 즐겨 보는 것은 오당기(오지 않는 당신을 기다리며)다. 주문한 음식이 올 때까지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콘텐츠인데, 혼자서 뭐라 뭐라 하는 영상인 것 치고 내용이 꽤나 들을만하다. 노래를 추천하는 코너가 있긴 한데 그걸 제외하면 사소한 주제로 얘기를 시작해 꼬리의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여러 가지 단상을 늘어놓는 식이다. 예전에 혼자서 생각했던 사념들, 아니면 말하다 떠오르는 각종 아이디어를 듣고 있노라면 문상훈이라는 사람의 매력이 한껏 돋보인다. 사소한 얘기라도 거기엔 늘 어떠한 인문학적 관점이라든가 한 분야에 대한 전문지식이 담겨 있었다. 언뜻 보면 잡설 콘텐츠 같다가도 예쁜 색의 채소가 고루고루 버무려져 있는 것처럼 알차고 옹골진 잡채 같다. 평소에 인간 그 '잡채'로서 지식을 많이 채워둬야 뭘 해도 매력적으로 보이겠다는 생각을 했다.


회사 얘기도 빼놓을 수 없다. 하루에도 서너 건의 각기 다른 프로젝트를 깔짝깔짝 진행하다 보면 이렇게 잡채일 수가 없다. 이 회의 잠깐 들어갔다가, 저 서류 몇 번 들춰보면 어느 하나 진전사항도 없이 하루가 홀딱 지나간다. 결국 내일도 잡쳐버린 제안서를 어떻게든 조치하기 위해 일요일 출근이 확정됐다. 일요일은 원래 쉬는 날 아닌가, 며칠 전에는 출근하고도 머리가 안 돌아가서 사무실 책상에 목석처럼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았었는데. 다른 거 들먹일게 뭐가 있나. 사람 사는게, 일주일이 잡채 그 잡채다.


상념에 빠질 때가 많다. 뭔가 깊고 골똘하게 생각하는 건 좋지만 소리 내서 말하지도 않고 그저 혼자 되뇌다 보면 아주 협소한 관점에 매몰될 때가 많다. 잡채로 치면 양파도 볶고 시금치도 볶아야 하는데 당근만 죽이 될 때까지 계속 볶고 있는 거다. 세상이 주황색으로 보일 지경까지 그렇게 혼자서 자신을 들들 볶는다. 그러다 갑자기 정신이 들 때가 있다. 뭐야, 나 또 작은 걱정을 골칫거리로 만들고 있었네. 조금 다른 예시로 망친 당근을 넣고 잡채까지 만들어버렸다고 치자. 이제는 작은 걱정이 아니라 폐기물이 돼버린 생각을 남에게 말하면 "이건 또 뭔 당근 잡채 같은 소리야"라는 소리나 듣게 된다. 혼자 속앓이를 하고 남들에게 이해도 못 받는 상황까지 가버리는 거다. 사소한 걱정은 짧게, 근심이나 망상이 되기 전에 재빠르게 털고 일어나야 한다. 다른 것까지 망쳐버리기 싫으면.


예랑이는 최근에 잡채가 그렇게 맛있다고 한다. 이유는 2022년 망년회를 한정식집에서 했는데, 양이 적어서 서로 눈치를 보면서 먹었다고 한다. 비싼 집이니 꽤나 맛도 있었겠지만 그 감질맛이 더 잊히지 않는 거겠지. 잡채는 손이 많이 가서 정성스러운 음식의 대명사이기도 한데, 어찌어찌 시도는 해볼 수 있겠으나 잡채맛을 모르니 만들어줄 수가 없어서 미안하다. 일 잡쳤을 때의 맛은 확실히 아는데.


가벼운 시를 써보자 하고 떠오르는 얘기들을 단락별로 적으니 벌써 6가지나 된다.  글이야말로 '잡채  잡채'.  단락을 마무리하면 맞춤법 검사를 하고, 적당히 타이틀을 적고 발행을 하겠지. 이렇게 잡다한 사연도  주제로 모아놓으니  편의 브런치글이 된다. 아마 잡채가 탄생한 이유도 비슷하지 않을까 한다. 처치 곤란인 소량의 야채들을 한데 모아서 정성을 들이면 '요리'고 칭해진다. 오늘 은 인생이란 여러 이 얽힌 잡채이니 사소한  가지에 매몰되지 말며 살자는 생각이 들어 노트북을 켰는데, 먹지도 않고 이렇게 잡채의 맛을 아간다.


*사진 출처: 마켓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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