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멍의 시간
이번 주말에는 좀 늦게 나가기로 했다. 그간 경험을 종합해볼 때 황조롱이는 10시쯤 나오는 거 같아서다. 오늘 딸은 황조롱이의 호버링 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했다.
봄바람 치고는 바람이 세다. 이런 날에도 새가 나올까, 새가 날 수 있을까 싶은 바람이다. 아니나다를까, 습지에는 사람도 별로 없고, 새도 별로 없었다. (아니 어딘가에 있겠지. 우리 눈에 안 보일뿐ㅎ) 습지에서 가장 흔히 보이는 백로와 흰뺨검둥오리만이 더러 보였다. 지난주 가마우지 잠수를 지켜보던 다리로 가보았지만 백로 한 마리와 동네 할아버지가 물가에 묶어놓은 염소 세 마리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을 뿐이었다. 딸이 애타게 보고싶어한 황조롱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기다리면 오겠지, 1시간쯤 기다려보았지만 끝내 보이지 않았다. 헛걸음했나? 오늘 우리 완전히 새 되는 건가? 실망감이 들 법도 한데 그러지 않았다. 그냥 멍~~~하고 새를 기다리는 시간이 좋았다. 새가 보이지 않아 더 길어지는 시간이 좋았다. 이름하여 새멍(새 기다리며 멍 때리는 시간)
새를 보려면 하늘을 봐야 한다.
하늘 구석구석을 훑어야 한다. 가까이 올려다 보기도 하고, 저 멀리 바라보기도 해야 한다. 곧 비라도 내릴 듯한 묵직한 먹구름의 무게감과 금방 날아갈 듯한 바람 소리의 공감각적 조합은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했다. 심호흡을 했더니 가슴이 뻥 뚫리는 듯 했다. 뭉게뭉게 피어나는 흰 구름만 예쁜 게 아니었다. 먹구름마저 아름다웠다. 그러고 보니 개발제한구역인 우리 동네는 big sky다. 사방에 높은 건물도 높은 산도 없어 하늘이 뻥 뚫려있다. 저 멀리 주상복합 아파트만 빼면 몬타나 못지 않은 큰 하늘이다. 이렇게 오랫동안 큰 하늘(빈 공간)을 본 적이 있었나? 새를 기다리고 있다는 목적의식조차 사라지고 하염없이,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 보는 것 자체가 명상하는 기분이었다.
새를 보려면 기다려야 한다.
새는 한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호버링하는 황조롱이, 벌새 같은 새들이 잠시 정지비행하긴 하지만ㅎ) 새는 우리를 위해서 기다려주지 않는다. 우리가 기다려야 한다. 이렇게 하염없이 기다려본 적이 있던가. 기다리고 기다리다보면 우리가 뭘 기다리고 있는 건지조차 까먹는 무념무상의 순간(멍~~~)이 온다.
새를 보려면 조용해야 한다.
처음에 황조롱이를 보았을 때 너무 신기해서 호들갑을 떨다가 쫓아버린 일이 있다. 지금도 떠들다가 딸에게 혼나곤 한다. 새는 주위가 소란스러우면 금세 날아간다. 말을 줄여야 하고, 이야기를 하려면 귀에 대고 소곤소곤거려야 한다.
새를 못 봐도 좋은 이유는 하늘을 보며 조용히 기다려야하기 때문이다. 각종 디지털 미디어에 혹사 당한 눈을 쉬게 하고, 각종 스트레스에 시달린 마음을 쉬게 하고, 입을 다물게 한다. 그것만으로 좋은 것이다. 그렇게 허탕치고 돌아서려던 그때 남편이 파랑새를 봤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등이 파랗고 배는 빨갛다고 했다. 도대체 뭐가 보인다는 건지, 아무리 봐도 맨눈으로 보이지 않았다. 남편이 고정시킨 망원경에 눈을 갖다대니 예쁜 새 한 마리가 들어왔다. 등은 청록색이고, 배는 주황색이었다. '저 새 이름이 뭐더라' 대장동 새 박사도 모르는 새가 있었다. 남편이 새 이름을 떠올리느라 애를 쓰는 사이 망원경을 들여다본 딸이 '물총새'라고 했다. 며칠 전 (왠지 이상한 동물) 도감에서 봤다는 것이다. 집에 와서 찾아보니 정말 물총새였다. 역시 좋아하면 알고 싶고 알면 보이는 구나.
나뭇가지에 앉은 물총새는 한참을 앉아 두리번거리다(아마 암컷을 찾아) 날아갔다. 아, 우리 모두 짧은 탄식의 소리를 냈다. 물총새의 찬란한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 있던 시간이었다. 뭔가에 홀린 듯한 기분도 들었다. 보려던 황조롱이는 못 봤지만, 뜻밖의 물총새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허거걱!!! 저것은!!! 우리가 그토록 기다리던 황조롱이가 아닌가!!! 황조롱이는 수직으로 높이를 달리하면서 호버링을 했다. 중력=양력, 추력=저항력의 순간이다. 우리 머리 위에서 한참을 머물러 있어서 우리를 노려보는 느낌도 들었다. 목표물을 발견했는지 전봇대 전선줄 높이보다 아래까지 내려왔다. 덕분에 맨눈으로 날개짓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우리 때문인지, 수직강하 사냥을 하지 않고 저 멀리 날아가버렸다.
집에 가려다 물총새를 보고, 집에 가는 길에 황조롱이를 보면서 새는 쫓아서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기다린다고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쩌다 마주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다 마주친 새들 덕분에 행복한 토요일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