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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엇이든 씁니다 Oct 18. 2020

집에서 불멍

집 짓는 이유, 그 첫줄

불 피우고 싶어서


왜 집을 지으려고 하냐는 건축가의 질문에 남편은 대답은 저렇게 시작했다. 고작 저게 집 짓는 이유의 전부는 아니지만 첫 줄이었던 것은 분명히 기억한다. 그리고 이사 온 지 어언 5개월이 지난 지금에서야 남편의 집 짓는 이유이자, 로망이자, 오랜 숙원사업인 불멍의 공간을 만들기로 했다.


작은 땅에 처음 계획보다 집이 커지고 바닥 면적이 넓어지면서 마당은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다. 그래도 포기할 수 있나. 불 피우고 싶어서 집을 짓겠다고 했으니 어떻게든 찾아야 했다. 반려견 여름이의 거처가 있는 뒷마당을 낙점했다.(처음엔 불 피우다 괜히 개 털 그을릴까 봐 걱정했으나 시험적으로 두어 번 피어본 결과 여름이는 전혀 불 가까이 오지 않는다. 불을 피우면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는 걸 보니 내가 너무 개를 만만히 본 거였음) 크기로 따지면 앞마당이 넓지만, 너무 훤히 드러난 곳이라서 불편할 것 같아서 작더라도 뒷마당을 선택했다.


여름이 입맛 다시는 순간을 포착


가장 저렴하고 관리가 쉬운 재료로 벽돌을 선택했다. 가까운 벽돌 가게를 수소문해서 찾아갔다. 사장님이 빨간 바닥 벽돌과 화로대를 만들 내화벽돌을 보여주셨다. 벽돌 한 장에 몇 백 원이면 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비쌌다. 심지어 내화벽돌은 한 장에 2천 원이었다. 가격을 듣고 아주 소심해져선 내화벽돌 30장, 바닥벽돌 100장을 사서 차에 싣고 돌아왔다.


저 멀리 창문 있는 여름이 집이 보인다.


먼저 가장 중요한 화로대의 위치부터 잡아야 했다. 워낙 좁은 곳인 데다 땅의 모양도 네모 반듯하지 않고 삼각형에 가까워서 중심을 잘 잡아야 했다. 내화벽돌 30장으로 최적의 모양(불 피우기에 좋고, 시각적으로도 예쁜 모양)을 만드는 것도 나름의 과제였다. 비싼 벽돌이 쓸 데 없이 남아서도 곤란하고, 모자라서도 곤란하다. 소꿉장난하듯이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면서 시시덕거리면서 화롯가의 위치와 모양을 잡아갔다.


내화벽돌로 화롯가 만들기


그다음 바닥벽돌을 깔기. 이런 일-단순 반복 작업은 내 적성에 꼭 맞는다. 벌어지지 않고 코너가 딱 맞아 들어갈 때 쾌감이 있다. 그렇게 한참 손맛에 재미있을 무렵 벽돌이 똑 떨어졌다. 어쩌나, 벽돌은 없고 빈 공간은 여전히 많았다. 벽돌을 더 사 오기로 했지만 이미 날이 어둑어둑해진 뒤였다.  


턱없이 부족한 벽돌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50장을 더 사 왔다. 역시 모자란다. 땅이 작아 보여도 막상 벽돌을 깔아보니 그렇지 않았다. 일단 아쉬운 대로 시험적으로 불을 피워본 다음 보강공사를 하기로 했다.


바닥 벽돌 보완했지만 아직도 부족한 바닥


남편이 뒷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 가까이 산이 있으니 땔감을 바로바로 조달할 수 있다. 나무를 해와서 나를 불러대는 소리가 벌써 신이 났다. 남편이 신이 날 만 했다. 땔감으로 쓰기엔 나무가 너무 예뻤다. 냄새도 좋았다. 소나무는 무겁고, 참나무는 가벼웠다. 남편이 자기는 나무꾼인데 선녀가 없다며, 실없는 소리를 해댔다. 한껏 감정 대방출을 하고 있는 남편을 오늘만큼은 구박하지 않았다.


앞이 소나무, 뒤에 참나무, 태울 때 냄새는 다르다


"스머프(남편 별명), 아주 신나 보이네."

옆집 아이도 눈치챌 정도로 남편은 신이 났다. 동네방네 방송이라도 해야 하나. 하긴 집을 짓는 이유가 비로소 완성되었는데 어찌 안 좋을까. 남편도 남편이지만, 시큰둥했던 나도 막상 불을 때고 불멍 하니 좋다 좋아! 나무 타는 냄새, 죽인다. 나무의 종류마다 다른 냄새, 눈물 콧물 흘리게 하는 매운 연기, 하필 나만 따라오는 연기의 방향, 타닥타닥 나무 타들어가는 소리, 제 각기 다른 모양으로 튀어 오르는 불꽃, 벌겋게 타들어가는 나무를 바라보며 우리는 함께 또 각자가 되었다.


불멍은 참 신기하다. 불은 이야기를 부르지만, 침묵도 환영한다. 시각, 후각, 청각 모든 감각이 활성화되다 못해 마비되어 말 그대로 멍해지는 순간이 있다. 이른바 불멍은 한 공간에 있지만 각자 또 다른 시공간, 다른 세계를 다녀오게 하는 위력을 발휘한다. 그렇게 각자의 세계를 유영하다가 고구마가 익어갈 무렵 같은 시공간에 모여서 고구마를 까먹는다. 불멍 하다가 출출해진 배를 달달하게 채우고 있노라니 인생 뭐 있나, 이게 인생이지, 행복이 별건가, 이게 행복이지, 인생의 참맛을 알 것만 같은 오만한 생각에 이르게 된다.


불멍 시작 10초 전


뻔하다 뻔해. 한동안 우리의 삶이. 남편은 틈만 나면 나무를 하러 갈 것이다. 또 실없이 선녀 타령을 할 테고 나한테 한 소리 듣겠지. 나무를 잘라서 툇마루 아래에 차곡차곡 쌓아놓고 고구마도 틈틈이 쟁여두면서 호시탐탐 불 피울 날을 노릴 것이다. 온갖 핑계를 만들어 뒷마당으로 나가 고구마를 구을 거고, 군고구마 냄새에 나도 딸도 못 이긴 척 따라 나갈 거고, 까맣게 그을린 군고구마 하나씩 들고 까먹느라 손도 입도 까매지겠지. 그 와중에 군고구마 먹고 싶어 달려드는 여름이를 말리느라 정신이 없을 테고, 머리와 옷에 온통 불 피우는 냄새가 배일 것이다. 불멍에 제대로 멍해진 탓에 씻지도 못하고 그냥 엎어져서 잠이 들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가을은 불멍으로 익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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