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바람 Oct 02. 2019

#5 새댁의 외박

결혼 후 첫 해외 출장을 가게 되었다. 싱가포르에는 우리 브랜드의 매장이 있다. 마스터 프랜차이즈 출점이라 한국 본사에서는 소스 수출, 신메뉴 개발 등의 업무를 지원하고, 파트너사가 직접 운영한다. 처음 계약할 때만 해도 파트너사는 스타트업 회사였다. 하지만 5년이 지난 지금은 다양한 외식 브랜드를 보유하고, 홍콩 주식 시장에 상장한 큰 기업이 되었다. 싱가포르 파트너사는 구정 때가 되면 신년 행사를 한다. 전 직원과 투자자, 해외 파트너사를 초대하는 큰 행사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다. 달라진 점은 결혼하고 처음 가는 해외 출장이라는 것이다.


며느리가 되고 첫 번째 설날이었다. 해외 출장을 간다고 말씀드렸을 때 시어머니의 첫 마디가 인상적이었다.

"그럼 우리 아들 밥은 어떻게 먹니?"


그 한마디에 달라진 나의 지위를 실감했다. 나에게는 출장이지만, 시어머니에게는 외박이었다. 남편이 괌 워크숍을 간다고 했을 때, 시어머니는 내 걱정을 하지 않았다. 둘 다 충분히 독립적인 존재임에도, 나는 남편에게 종속된 기분이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엄마의 반응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너 없으면 김 서방은 뭐 먹니?"

"밖에서 사 먹거나 컵라면에 맥주 먹겠지. 왜, 굶을까 봐 그래?"


나는 괜히 엄마에게 쏘아붙였다. 남편을 두고 출장을 가고 싶지 않은 건 나였다. 우리는 신혼이었고, 매일 봐도 새롭고 재밌는 날들이었다. 대표님에게 올해도 꼭 가야 하나요,라고 묻자 대표님은 네, 다녀오세요,라고 했다. 나는 출장 일정을 최대한 짧게 잡는 것으로 소심하게 반항했다.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금요일 밤 비행기를 탔다. 이번 출장은 여직원 한 명과 동행이다. 남편이 아닌 다른 사람이 옆좌석에 앉으니 어색하다. 어느새 남편은 나에게 습관이 되었다.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불편한 잠을 청했다.


싱가포르에 도착한 건 새벽이었다. 호텔 체크인 시간까지 한참 남았다. 카운터에 짐만 맡겨두고 쫓겨나다시피 나온다. 이른 시간이라 갈 곳이 마땅치 않다. 시간을 때우기에 적당한 장소가 떠오른다. 택시를 타고 마리나베이 샌즈 호텔로 향한다. 싱가포르에 가면 매번 들르는 카지노장이다. 나에게는 공짜 커피숍 같은 곳이다. 싱가포르 스타일의 달달한 그린 티와 당충전에 최고인 핫초코를 무료로 마신다. 작은 생수도 한 병 챙긴다.


룰렛 머신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룰렛은 규칙이 간단해서 나 같은 초보자에게 적합하다. 3(쓰리), 2(투), 1(원) 하며 배팅을 독촉하는 라스트 카운팅과 쇠구슬이 또르르 굴러가는 걸 보는 시각적 재미가 있다. 숫자에 형용사를 붙이며 승자를 축하하는 카지노 딜러의 게임 진행은 오락적 요소까지 더해준다. 예컨대 ‘어메이징 나인’, ‘샤이닝 일레븐’과 같은 식이다.


1부터 36까지의 숫자와 0(제로), 00(더블 제로)로 이루어진 숫자판에서 내 운을 시험한다. 숫자 하나를 콕 찍어서 맞추면 36배당, 세 개의 숫자로 이루어진 한 줄에 배팅하면 12배당이다. 배당이 높을수록 실패할 확률이 높다. 소심한 나는 주로 3배당이나 2배당에 해당하는 무난한 배팅을 한다. 짝수와 홀수, 빨강과 검정과 같은 양자택일이다. 최소 배팅 단위가 10 SGD(싱가포르 달러)다. 잃고 따고를 반복한다.


호텔 체크인 시간이 가까워지자 미련 없이 일어난다. 꽤 운이 좋았다. 마리나베이 샌즈 호텔의 딘타이펑에서 점심을 샀다. 스타벅스에서 그린 티 라테를 마시고 택시로 이동한다. 호텔 방에 들어서자 피곤이 몰려온다. 야간 비행은 힘들다. 눈을 잠시 감았다 뜬다는 게 어느새 저녁 먹을 시간이다. 밥때가 되니 남편이 궁금하다. 밥은 잘 챙겨 먹는지 은근히 신경 쓰인다.


- 뭐 하고 있어? 밥은 먹었어?

- 응. 컵라면에 캔맥주 마셔.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는 자취생 모드다. 남편이 잘 있다는 걸 확인하고, 그제서야 함께 온 직원을 챙긴다. H는 내가 입사하자마자 뽑은 첫 번째 직원이다. 나의 사람 보는 눈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해준 직원이다. 5년째 근속하는 성실한 직원이며, 나의 밥 친구이자, 좋은 대화 상대다. 싱가포르는 나에게 익숙한 도시이지만, H에게는 모든 게 새로울 것이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저녁 관광에 나선다. 차이나타운에서 기념품 쇼핑을 하고, 발 마사지를 받는다. 로컬 펍에서 맥주를 마신다. 남편이 없는 해외에서 밤 12시까지 맥주를 마시는 호사를 누린다. 제법 싱글 같은 기분이 난다.


일요일 아침에는 야쿤 카야 토스트를 먹는다. 나의 싱가포르 출장 루틴이다. 달달한 카야 쨈과 버터가 들어간 바삭한 토스트가 일품이다. 수란과 연유 커피를 곁들여 먹으면 최고의 아침식사가 된다. 싱가포르에 머무르는 기간에는 매일 먹는다. 카야 토스트를 먹는 사진을 몇 장 찍어 남편에게 전송한다.


오후 일정은 예상치 않게 흘러갔다. 싱가포르에서 근무하는 대학 선배와 연락이 닿았다. 10년이 훌쩍 넘은 만남이지만 어색함보다 반가운 마음이 크다. 오차드로드 쇼핑몰에 입점한 우리 브랜드의 매장에서 갈비찜과 샤부샤부를 먹는다. 출장을 오면 한 끼 이상 매장에서 먹는 것은 나의 중요한 업무이기도 하다.


저녁에는 싱가포르 파트너한테 연락이 왔다. 한국에서 출장 온 손님들만 모인 캐주얼한 자리가 만들어졌다. 호커 센터에서 십여 명이 모여 타이거 맥주를 마셨다. 싱가포르 파트너가 사태(Satay)를 비롯한 안주를 끊임없이 가져온다. 해외에 진출한 외식업계 사람들과 명함을 교환하며 의미 있는 술자리를 가진다. 결혼하고 처음으로 남편과 떨어져서 주말을 보냈다.

호텔에 돌아오니 남편이 생각난다.


- 남편, 저녁은 먹었어?

- 응, 순댓국 먹고 왔어.


내가 없어도 남편은 잘 챙겨 먹는다.


월요일이다. 오늘 일정이 출장의 핵심이다. 오차드 로드의 파트너 회사에서 미팅을 한다. 신메뉴 교육 일정과 지연된 로열티에 대한 논의를 한다. 원하는 대답을 듣고, 만족스럽게 회의를 끝냈다. 오후 6시, 호텔에서 신년 행사가 시작되었다. 무대가 정면으로 보이는 센터 자리를 배정받는다. 오늘 행사의 드레스 코드는 ‘올드 상하이’다. 여직원들의 치파오가 물결을 이룬다. 싱가포르 대표가 인사말을 하고, 나를 포함한 각국 파트너들이 덕담을 한 마디씩 한다. 축사 후에도 사회자가 호명하여 무대에 여러 번 올라갔다. 기념사진을 찍고, 경품 추첨에 참여한다. 아이패드, 애플워치, 다이슨 드라이기 등 푸짐한 경품이 직원들에게 돌아간다. 해외에서 참석한 손님들에게는 황금돼지띠의 해에 맞게 금으로 된 황금돼지를 선물로 준다.


밤 10시가 되어서야 공식적인 행사가 끝났다. 2차를 가자는 제안을 거절하고, 호텔로 돌아온다. H가 먼저 씻으러 들어간다. 재빨리 남편과 영상 통화를 한다.


“별일 없지?”

“응, 아무 일 없어. 빨리 와.”

내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진다.


출장 마지막 날이다. 창이 공항 면세점에서 남편에게 줄 밸런타인 초콜릿을 산다. 비행기가 이륙한다. 내가 자는 동안에도 남편과의 물리적 거리는 가까워진다. H의 아버지가 공항에 마중 나오셔서 차를 얻어 타고 편하게 집까지 온다.


띠 디디디 딕. 도어록을 열고 집에 들어선다. 남편이 해맑게 웃으며 나를 맞이한다. 동남아의 더운 냄새가 남아 있는 채로 남편 품에 안긴다. 고작 한 번의 주말을 따로 보냈을 뿐인데, 오래 떨어져 있던 기분이다. 집안 여기저기를 둘러본다. 흰색 장판이 유난히 반짝거린다. 남편이 청소기를 돌리고, 물걸레질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작은방에는 빨래가 가지런히 널려 있다. 주방에는 밀린 설거지가 하나도 없다. 내가 없는 동안 남편은 성실하게 집을 돌보았다.


"남편, 저녁은 먹었어?"

내 목소리가 부드러워진다.

이전 04화 #4 첫 번째 설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