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원의 어쩌다 농부]벌써 1년
프랑스 사실주의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은 누구나 한 번쯤 보았을법한 유명한 그림이다. 밭에서 추수를 마친 밭에서 이삭을 줍고 있는 농부의 모습을 사실주의적 기법으로 묘사한 그림이다. 이 그림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직전까지 평범한 농부를 그림의 소재, 주제로 삼은 적이 없다는 데 있다. 이 그림에서 비로소 평범한 대중이 그림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그 사실을 알고 보니 그림이 더 친숙한 느낌이 든다.
농촌에서는 가을이면 매일 이삭 줍기가 펼쳐진다. 일 년 동안 부지런히 농사를 지은 농부들이 결실을 거둬들이고 긴 휴식에 들어가는 계절이 가을이다. 이때가 바로 이삭 줍기 신공을 발휘할 때다.
몇 년 전 인삼 수확을 마친 밭에 이삭 줍기를 다녀온 적이 있다. 마침 우리 집이 인삼 농부에게 대여해 준 밭이라서 이삭 줍기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인삼을 캔다는 소식을 듣고 인삼밭 이삭 줍기를 가보니 밭두렁 앞에 이삭 줍기를 하려고 모여든 할머니들이 삼삼오오 앉아있었다. 인삼 주인이 농기계를 이용해 인삼을 모두 캐 트럭에 싣고 떠나면 그때부터 이삭 줍기의 시간이다. 부리나케 뛰어들어 빈밭을 샅샅이 훑어가다 보면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부러진 인삼 뿌리를 속속 발견할 수 있다. 인삼은 아무리 작은 실뿌리라도 모아놓으면 여러모로 쓸모가 있으니 실뿌리 하나라도 눈에 띄면 주워 들어야 한다. 삼계탕에 넣어 끓여 먹어도 좋고, 고추장 넣고 조물조물 무쳐 반찬처럼 먹을 수 있다.
부러진 인삼뿌리를 찾다가 가끔 대어를 발견할 때가 있다. 실뿌리를 잡아당겼는데 온전한 인삼 한뿌리가 나오는 경우다. 이럴 때 짜릿한 손맛이 느껴지면서 무엇에 비할 수 없는 아드레날린이 샘솟는다. 낚시를 해보지는 않았지만 대어를 낚았을 때 기분을 알 것도 같다. 옆의 할머니에 뒤질세라 눈을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고 발을 재게 놀려가며 주운 인삼이 검은 봉지를 가득 채웠다. 인감 봉지를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어찌나 웃음이 나는지, 앞으로 인삼 캐는 집이 있으면 빠짐없이 이삭 줍기 하러 가리라 다짐했다.
발걸음도 가볍게 집으로 돌아가 엄마에게 봉지를 내밀었다. 어린 시절 100점 맞은 성적표를 내밀던 그 심정이었다.
봉지 속 내용물을 본 엄마가 상자를 하나 갖고 나와 눈앞에 내려놓으셨다. 튼실한 인삼이 서너 뿌리 담긴 인삼상자였다.
“인삼 캔 분이 놓고 가셨다. 밭 빌려줘서 고마왔다고.”
인삼 주인이 놓고 간 인삼은 한 눈에도 크고 실해 보였지만, 나는 내가 이삭 줍기 한 인삼이 더 소중했다.
요즘 가장 인기 있는 이삭 줍기 현장은 콩밭이다. 콩은 가장 늦게 수확하는 작물이다. 콩잎이 시들어 떨어진 후 줄기가 말라야 비로소 수확한다. 서리태는 서리 맞을 때 수확한다고 해서 서리태다. 누구네 집에서 콩을 털었다는 소문을 듣고 이삭 줍기를 하러 동생과 함께 밭으로 출동했다.
콩밭에는 이미 동네 어르신 두 분이 허리를 숙여 콩을 줍고 계셨다. 이에 질세라 동생과 나는 재빨리 밭으로 뛰어들어갔다.
콩 역시 기계로 수확하다 보니 꼬투리가 벌어진 콩에서 알이 튀어나와 밭에 여기저기 떨어져 있었다. 잘 익은 콩이 널려있어 콩을 줍는 재미가 쏠쏠했지만 그에 못지않게 허리 통증이 밀려들었다. 돌아보니 동네 어르신들은 모두 엉덩이 방석을 깔고 앉아 이삭 줍기를 하고 계셨다. 콩 이삭 줍기에는 엉덩이 방석이 필수품임을 새삼 알게 되었다.
엉덩이 방석 없이 서서 허리를 숙여 콩을 줍는 동생의 모습이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과 똑같았다. 다음에는 머릿수건을 쓰고 나오라고 해볼까.
약 1시간 정도 콩을 주웠더니 2컵 정도 양이 됐다. 동생과 나는 "이삭 줍기 열심히 하면 내년 먹을 콩을 장만할 수 있겠다"면서 희희낙락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수확을 마친 배추밭에서도 이삭 줍기를 쏠쏠하게 할 수 있다. 올해 병든 배추가 많아 배추를 아예 수확하지 않고 버려둔 밭들도 꽤 있다. 이런 곳에 나가면 비교적 멀쩡한 배추를 이삭 줍기 해 올 수 있다. 무도 마찬가지. 작고 상품성 없어 버려진 무를 잘 챙겨 오면 겨우내 볶아 먹고 지져 먹을 수 있다.
시골에서 살면 식비에 돈이 덜 든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이삭 줍기를 하지 않으면 버려지고 말 작물과 채소들을 마지막까지 살뜰하게 거둬들인다는 점 같다. 땅이 내준 소중한 농작물을 한 톨도 버리지 않고 잘 거둬 먹는 것이야말로 자연의 고마움을 오래 음미하는 일이 아닐까?
어쩌다 농부가 된 나는 올가을, 밀레의 그림을 다시 떠올려보았다. 명화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기쁨에 마음이 더 풍성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