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원의 어쩌다 농부]벌써 2년차
농한기란 단어가 이토록 좋을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다. 풀을 뽑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한가하고 좋은지.
풀과 나는 얼마 전 휴전협정을 체결했다.
풀:너무 열심히 전쟁을 치렀더니 이제 전투식량이 바닥났다. 휴전하자.
나: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기다렸다.
풀:반가워하니 좋군. 그럼 내년 봄에 보자.
나:아쉽진 않지만 그래도 아쉽다고 말하겠다. 내년에 보자. 되도록 늦게 보면 좋겠다.
빈밭이 이토록 아름답다는 것도 예전엔 미처 몰랐던 일이다. 치열한 여름의 기억을 뒤로하고 긴 숨을 쉬며 몸을 누인 빈밭을 무심하게 바라보는 일은 더없이 평화롭다.
농한기를 만끽하기 위해 지난주 영월군 북면 마차리라는 작은 마을에서 열리는 축제에 다녀왔다. 축제의 이름은 ‘마차리국제아트페스티벌‘이다. 2025년 10월 24~25일 열린 축제는 마차리라는 작은 마을을 훌륭한 아트 페스티벌의 장소로 변모시켰다.
대절버스에서 내려 마을에 들어서자, 작은 마을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풍경이 펼쳐졌다. 소나무와 연못을 배경으로 북적북적 사람들이 모여있고, 곳곳에 예술가의 설치 작품들이 무심하게 툭툭 펼쳐져 있었다. 먼 곳에서 온 손님들을 위한 빵과 와인, 추위를 녹여주는 화톳불까지 세심하게 마련돼 있었다.
마차리는 과거 탄광촌이 있던 마을로, 번성했던 시기를 지난 후 쇠락에 접어들었다. 인적 끊긴 마을에 문화로 다시 온기를 불어넣은 사람이 있으니 바로 윤보용(사회적 협동조합 리플레이스 이사장) 살롱드 마차리 대표다. 금융인으로 일하다 영월에 귀촌해 와이너리를 운영하며 마을 문화 운동을 펼치고 있다.
올해 축제 주제는 ‘마더 네이처 MOTHER NATURE’였다. 우리 모두의 어머니인 ‘자연’을 주제로 한 회화, 조각, 사진, 설치 등 다양한 작품이 전시됐다. 짚으로 만든 설치 작품부터 닥종이 작품, 달항아리, 회화, 서예 등이 보는 재미를 전해주었다. 스프레이 페인트로 그림을 그리는 벨기에 그래피티 작가 드니 마이어의 라이브 드로잉도 진행됐다.
패딩 점퍼에 그래피티를 해줄 수 있는지 물어보았더니 작가는 흔쾌히 그려주겠다고 했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나의 검은 패딩이 작가의 페인팅으로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예술작품으로 탄생했다. 작가가 써준 단어는 ‘코리아 러브 KOREA LOVE’였다. 한국을 사랑하는 작가의 마음이 느껴져 더욱 소중한 기분이 들었다.
축제를 즐기는 다양한 관람객 중 단연 눈에 띄는 분이 있었다. 무용가 홍신자 선생님이었다. 홍신자 선생님은 팔순을 넘긴 나이라고 믿기지 않게 꼿꼿한 자세와 세련된 패션, 부드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사로잡았다. 함께 간 선배는 “기자 초년병 시절 홍신자 선생님을 인터뷰했던 인연이 있다”면서 선생님께 뛰어가 두 손을 맞잡았다. 선생님도 반가워하시며 “다음주에 공연을 하니 보러 오라”고 공연에 초대해주셨다. 팔순을 훌쩍 넘긴 나이가 무색하게 매주 공연 무대에 서고 있다는 선생님의 열정적인 모습에 감동을 넘어 전율이 느껴졌다. 앞으로 게을러지고 싶어질 때마다 선생님의 꼿꼿한 허리를 떠올리게 될 것 같다.
‘살롱 드 마차리’의 윤보용 대표는 “작가는 작품을, 주민은 일상을, 마차리는 무대를 제공하는” 취지라고 축제의 의미를 밝혔다. 그의 한마디에 모든 게 설명됐다. 그는 단순히 전시를 여는 게 아니라, 마을과 예술을 함께 엮어내고 있었다. 마을 전체가 하나의 공동체이자 예술품이었다.
해가 기울자, 화목난로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나무 타는 냄새가 코끝에 스몄다. 그 앞에 둘러앉은 사람들의 얼굴이 차츰 붉게 물들어갔다. 와인잔 부딪히는 소리가 맑게 울려 퍼지고, 다정한 웃음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마차리의 가을은 그렇게, 내 안에 깊은 향기로 남았다. 농한기가 준 귀한 선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