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원의 어쩌다 농부]벌써 2년차
지난 8월 말, 모종 해놓은 배추를 심었다. 지역에 따라 조금 차이가 있지만 통상적으로 8월 15일부터 9월 초가 김장배추를 심는 시기다. 그런데 올해는 더위가 대단했는 데다 윤달 때문에 더위가 오래갈 거라는 전망까지 있어 배추 심는 시기를 심사숙고해야 했다.
배추는 더위에 취약한 녀석이다. 빨리 심으면 더위를 버티지 못하고 타 죽고 만다. 아예 9월 중순에 심을까도 궁리했지만 그렇게 늦게 심었다가 추위가 빨리 닥치면 또 어쩌나 싶어 오락가락하다가 ‘평소대로‘ 심기로 했다.
배추 모종을 싣고 시골로 내려가려고 하니, 서울집 베란다에서 키운 배추 모종은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심은지 20일이 넘었는데 잎이 한두 개밖에 안 나온 게 키만 삐죽 커 “이게 커서 김장 배추노릇을 할까” 싶었지만, 잘나도 내 배추, 못나도 내 배추다. 아직 덜 자라 비실비실한 모종을 싣고 시골에 갔다.
텃밭에 당도해 보니, 참깨를 베고 휑할 것이 자명한 밭에 뭔가 푸릇한 것이 보였다. 다가가보니 우리 텃밭에 배추가 조르르 심어져 있다. 우렁각시가 다녀갔다!
지지난주였던가? 시골 친척 아재의 전화를 받은 생각이 났다.
“우리가 배추 모종을 넉넉히 했으니 내려와서 갖다 심어라. “
그 전화를 받고도 이런저런 바쁜 일로 시간이 흘렀고, 아재의 모종은 잊어버리고 있었던 참이었다.
배추 모종을 넉넉히 내고 가져다 심으라고 전화까지 했는데도 오지 않으니 우렁아재가 모종을 들고 와서 우리 집 밭에 심어주고 간 것이었다.
올해 더위가 오래갈 거라던 일기 예보는 완전히 빗나갔다. 오히려 예년보다 더 빨리 서늘한 날씨가 당도했다. 더위 예보만 믿고 배추를 늦게 심었다면 낭패를 볼 뻔했다.
아재가 심어준 배추는 어제 내린 비를 맞아 파릇파릇 싱싱하게 잘 자라고 있었다. 날씨가 덥지도 춥지도 않아 배추가 자라기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우렁아재가 심어준 배추를 세어보니 약 120 포기! 그 옆에 무도 어림잡아 50개 넘게 싹을 내밀고 자라고 있다. 배추 120 포기에 무 50개라니. 올해도 김장 전투는 치열할 것으로 예측된다.
동생과 나는 우렁아재의 배추에 감동받아 놓쳤던 정신줄을 다잡고 우리가 베란다에서 키워온 모종을 들여다보았다. 아무리 비실비실하다 해도 3주 가까이 애지중지 키운 소중한 모종이 아닌가.
“다 살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동생과 나는 서울에서 가져온 30여 개의 배추 모종을 심었다. 하도 비실비실해서 “이게 안 죽고 살아날까”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배추 모종이 들을까 봐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이미 밭에는 120 포기의 배추가 잘 자라고 있기 때문에 비실 모종이 비실비실한 게 조금도 걱정되지는 않았다. 가진 자의 여유라는 게 이런 거구나. 배추 모종 덕분에 생애 처음으로 가진 자의 여유를 맛보게 되었다.
지난해에는 50 포기의 배추 모종 중 한 포기도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서울에서 영월을 매주 오가며 노심초사, 애면글면 배추를 돌봤다. 그럼에도 벌레에게 생장점을 먹혀 죽거나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말라죽는 배추가 한두 개 나올 때마다 얼마나 마음이 쓰렸던가.
그런데 올해 살려면 살고 죽으면 할 수없고 배짱 튕기며 심은 배추들은 놀랍게도 하나도 죽지 않고 다 살았다. 밀당의 법칙이 배추에게도 통한단 말인가.
비실 배추는 우렁아재의 배추 곁에 있으니 더 비실해 보였지만 뿌리가 잘 활착 되었고 새 이파리도 틔우면서 부지런히 자라고 있다. 이대로라면 훌륭한 김장배추가 될 것으로 보인다.
나의 한 해 농사를 규정짓는 두 단어는 참깨와 배추라고 할 수 있겠다. 참깨농사는 성공리에 마무리했으니, 이제 배추농사만 성공하면 ‘퍼펙트 이어즈‘가 된다.
퍼펙트 이어즈를 기대하며 추석 즈음 시골에 내려갔는데 이게 웬일. 잘 자라고 있을 줄 믿고 있던 우렁아재의 배추가 무름병에 걸려 시들시들 죽어가고 있었다.
‘배추 무름병은 고온다습한 환경에서 배추의 잎, 줄기, 뿌리 등 연약한 조직에 세균이 침입해 조직이 물러지고 썩는 병으로, 발생 시 치료가 거의 불가능해 예방이 매우 중요하다 ‘고 돼 있다. 지난해에는 참깨 수확한 자리에 배추를 심었어도 아무 문제 없이 잘 자랐는데, 올해 배추 무름병이 온 걸 보면 가을에 비가 자주 내려 땅이 습해진 것이 원인인 것 같다. 엄마는 배추무름병에 걸린 배추를 가차 없이 뽑았다. 그냥 두면 다 썩을 뿐 아니라 주위 배추까지 번질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의 텃밭에서는 비실배추가 기대주로 급부상했다. 저게 배추가 될까 의심했던 그 마음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기를 정말 잘했다.
비실배추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