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돌아가는 길
Pink + White - Frank Ocean
산티아고로 돌아오니 이미 거리는 어둑해져 있었다.
칠레의 수도인 이 도시는 밤에도 다니기 괜찮아 보였다. 물론 으슥한 골목을 들어가는 것은 여전히 경계를 해야겠지만, 적어도 큰길에서 다닐 때는 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가로등도, 차도 서로의 거리를 유지하려는 듯 빛을 밝히고 있었다. 사람들도 질서를 지키며 걷고 있었다. 해외여행을 다니다 보면, 밤에 거리를 다닐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가 알게 된다. 한국이라는 안전한 나라에서 살다 보니 종종 잊고사는 장점이었다.
칠레에서의 마지막 이틀을 보내게 될 숙소를 향해 발걸음을 바삐 옮겼다. 시내에서 살짝 떨어진 곳이라 지하철을 타야 했다. 한 번 익숙해지면 아무것도 아닌데, 처음에는 반드시 낯선 행위. 그것은 바로 외국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나라마다 대중교통 이용방식은 미묘하게 다르다.
M과 H는 한참 지하철 노선도를 쳐다봤다. M은 이제 알겠다는 듯 ”이쪽이야“라고 말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우리 숙소를 향하는 지하철을 어렵지 않게 탈 수 있었다.
여행자로서 M의 가장 큰 능력은 길을 잘 찾는다는 점이다. 아무리 복잡한 길이라도 M은 틀리는 법이 없었다. 세상 어디에 던져놔도 삶을 헤쳐나갈 수 있는 사람. 경험과 직감 모두 잘 발달된 인간. 그게 내가 M과 함께 여행을 하며 느낀, 그의 가장 큰 장점이었다.
지상으로 나오니 큰 주유소가 하나 보였다. 뒤에는 아파트들이 즐비했다. 층층마다 제각기 다른 색으로 밤을 밝히고 있었다. 어두운 방 중 하나가 우리가 이틀 동안 묵을, 칠레의 마지막 숙소였다.
숙소는 작은 아파트였다. 방이 두 개에 화장실 하나. 우리로 따지면 실평수가 20평이 채 안될 작은 아파트였다. 큰 방에는 싱글침대 두 개가 작은 방에는 싱글침대 한 개가 놓여있었다. 아무리 가까운 친구여도 잠은 혼자 자는 것이 당연히 편했다. 그러나 M과 H는 나를 위해 독방을 양보했다. 그게 심란한 시기를 겪어내고 있는 나에 대한 그들의 작은 배려였다. 나는 당시에는 마음의 여유가 없어, 그 고마움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파타고니아에서부터 먼 길을 비행기로 이동해서 굉장히 피곤했다. 우리는 들어오기 전 근처에 있는 마트에서 저녁으로 먹을 소고기와 야채, 그리고 와인을 몇 병 샀다. 질 좋은 고기와 와인이 상당히 저렴한 나라였다. 씻지도 않고 허기를 달래기 위해 허겁지겁 저녁을 먹었다. 와인 한 병을 셋이 다 비우기도 전에 식사가 끝났다. 배고픔이 가시니 안정이 찾아왔다. 참 편안한 숙소였다.
한 명씩 돌아가며 씻는 동안, 남은 둘이서 와인잔을 부딪히며 대화를 이어갔다. 여행의 끝자락에 도달하게 되니, 밤이 깊어가며 이야기도 무르익었다.
베란다를 나가니 작은 탁자와 캠핑용 의자 두 개가 있었다. 비바람을 가려주는 지붕은 있었으나, 중간 부분은 밖으로 뚫려있었다. 낙상을 방지하기 위함인 듯, 철조망이 둘러져 있었다. 집주인(에어비앤비 호스트)은 콘크리트벽과 철조망의 간극을 예쁜 식물들로 채웠다. 화분이 줄지어 있으니 분위기가 참 좋았다. 밖에서 불어오는 상쾌한 바람이 뒤통수를 간질였다.
M은 씻고 나온 뒤, 방에 들어가 여자친구와 통화를 시작했다. 칠레(산티아고)와 한국의 시차는 정확히 12시간. 어둠이 짙어가는 산티아고의 8시는, 한국에서는 하루를 시작할 시간이었다. 당시에 M이 만나던 여자친구 S는 내가 소개해준 사이었다. 그녀는 재즈 동아리 동기로,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나와 지속적으로 연락을 주고받던 사이었다. 가장 친한 남자친구와 가장 친한 여자친구를 이어주는 것은 나에게도 꽤나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소개팅이라는 게 그렇지 않은가? 잘 될 확률은 극히 희박했다. 잘 안되면 불편해지는 것은 나였다. 그럼에도 나는 뭔지 모를 감에 이끌려 둘의 만남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내가 너무 밀어붙이니 M과 S는 처음에는 굉장히 부담스러워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만나자 불꽃이 튀었다. M과 S가 연애를 시작한 지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은 풋풋한 시절이었다.
H 역시 누군가를 마음에 품고 있는 듯했다. 이상하게 같이 일하는 팀원일 뿐이라던 J라는 친구를 이야기할 때마다 얼굴이 꽃보다 더 활짝 피었다(모자이크로도 가려지지 않는 그의 웃음).
시계를 들여다보지 않고 도시를 바라보면 시간을 잘 알기 어려웠다. 저녁 9시나, 자정이나 도시가 거리를 비추는 방식은 큰 차이가 없었다. 우리는 시계를 보지 않고 대화를 이어나갔다. 자정, 어쩌면 새벽 한 시, 아니 두 시. 그쯤 우리의 대화도 마침표를 찍었다. 대화가 끝나기 전에 슈퍼에서 사 온 와인 세 병이 먼저 떨어진 탓이었다.
다음날, 일찍부터 길을 나섰다. 불과 며칠 전 돌아다녔던 산티아고 거리였지만 내 마음은 무언가 달라져 있었다. 파타고니아의 설산과 빙하가 나에게 준 선물인 듯, 마음이 고요했다. 그 감정은 어젯밤 친구들과 대화를 하며 더욱 선명해졌다. 사표를 철회하고 다시 돌아가겠다는 의지, 돌아간 뒤 힘든 일을 겪더라도 기꺼이 받아들이고 버텨내겠다는 의지가 내 안에서 자라났다.
무작정 은행에 들어가 미국 달러를 칠레 페소로 환전했다. 사실 수수료를 조금 내더라도 카드를 쓰면 되는 일이었다. 우리는 그래도 셋 다 금융권에서 일하는데, 이 나라의 금융회사는 어떻게 일을 하는지 구경해 보자는 호기심에 무작정 은행에 들어가 번호표를 뽑고 기다렸다. 우리보다 훨씬 느릿느릿 업무처리를 하고 있었다. 직원은 앞에 앉은 손님과 사담도 나누며 충분하게 업무를 처리했다. 기다리는 손님은 직원을 재촉하지 않았다. 우리와 다른 것은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여유였다. 누구도 숨 넘어갈 것처럼 급하게 살지 않았다.
시간이 조금 난 김에 박물관도 들렀다. 지도로 보니 다시금 칠레가 얼마나 긴 나라인지 느껴졌다. 스페인어를 하지 못하니 작품들이 무엇을 표현한 것인지는 정확하게 알기 어려웠다. 다만 그림이나, 전시, 그리고 고대 칠레인들의 유물이 모두 '사람'을 향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정확하게 느껴졌다.
박물관을 나와 와인 상점으로 들어갔다. 와인은 일인당 두병까지 면세였다. 우리는 서울에서 재회해서 먹을 와인을 각자 한 병씩 골랐다. 그리고 남은 한 병은 각각 마음속에 떠오르는 누군가를 위해 골랐다.
나는 가족과 함께 마실 와인을(내 여자친구는 술을 전혀 하지 않았다), M은 여자친구인 S와 함께 먹을 와인을, H는 팀원인 J에게 선물할 와인을 오랫동안 골랐다. M이 S를 위해 와인을 고르는 시간보다도 더, H는 팀원일 뿐이라던 J에게 선물할 와인을 고르는데 오랜 시간을 썼다. "J는 그냥 팀원이라며, 그냥 팀원 맞아?"라는 내 질문에 H는 "아닌 것 같아"라며 솔직하게 대답했다.
와인을 다 고르고 나니 배가 고팠다. 나는 한인거리에 있는 치킨집에서 치킨을 사서 집에서 먹자고 친구들을 졸랐다. "여기까지 와서 뭔 한국치킨이야"라며 나를 타박하던 M은 결국 마트에서 신라면을 집었다. 나를 놀리면서도 항상 나를 배려하는 사람들이 M과 H였다.
칠레에서의 마지막 이틀은 대화로 가득 채워졌다. 와인 때문인지, 지나버린 시절 때문인지 정확히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았는지는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그 대화 속에서 사람을 이야기하고 사랑을 노래했다. 사표를 던지고 나온 회사를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부담감도 내려놓은 채, 20대의 끝자락에서 청춘이 피어났다.
시간이 흘러 M은 내 친구인 S와 결혼을 하고 아빠가 되었다. H도 같은 팀원일 뿐이라던 J와 결혼을 했다. 칠레에서 돌아온 뒤 H가 엄선한 와인을 J에게 선물하자, 그녀는 "오빠 이럴 거면 그냥 확실하게 해. 나랑 만날 거면 만나고, 아니면 이런 선물하지 마"라고 H에게 화끈한 대답을 했단다. 나는 그들의 결혼식에서 건넨 축사글에서, 칠레에서부터 피어난 사랑을 꾹꾹 눌러썼다. 물론 나도 당시에 만나고 있던 여자친구가 평생을 약속한 아내가 되었다. 셋 뿐이던 친구들의 여행은, 이제는 여섯이, 앞으로는 아이까지 아홉 이상이 될 터였다.
서울로 돌아가는 비행은 길고도 아득했다. 열 시간 걸려서 미국의 텍사스 공항으로, 그리고 다시 열세 시간 남짓 한국으로. 꼬박 하루가 넘는 비행동안 나는 다시금 직장으로 돌아갈 마음의 준비를 해야만 했다.
여행을 갈무리하고 귀국행 비행기를 타러 산티아고 공항으로 향했다. 목적지에 도착해 택시에서 내린 순간 하늘은 핑크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흰색 구름으로 뒤덮였던 하늘에 붉은 노을이 젖어들고 있었다.
낮과 밤의 경계의 시간. 하늘을 보며 내 인생 역시도 경계의 순간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발만 내딛으면 다시 돌아갈 수 없는 회사 밖으로, 한 발만 물리면 다시 조직으로. 나는 남미 여행을 하며 다시 물리는 선택을 했다.
물론 회사에 돌아간 뒤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이전보다 더욱 힘든 시기들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껏 버텨냈다. 내가 선택한 길이기에. 내가 무너져도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워줄 수 있는 친구들과 가족들이 있었기에. (끝)
Won't let you down when it's all ruin
모든 게 엉망이어도 널 실망시키지 않을게
Just the same way you showed me, showed me
네가 내게 보여준 것과 똑같은, 그 방식으로
Pink+White 가사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