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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의 땅, 남미 -4

과거의 나와 마주하기.

by 모블랙
독(Feat. E-Sens) - 프라이머리


*이 글은 이중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이센스가 '독'에서 독백처럼 내뱉는 가사입니다. 반면, 등산의 기록은 7년도 넘은 과거의 이야기입니다. 이 글은 두 이야기가 만나는 지점을 향해 달려갑니다.




Verse 1 (0:00~)
시간 지나 먼지 덮인 많은 기억. 시간 지나면서 내 몸에 쌓인 독. 자유롭고 싶은 게 전보다 훨씬 더 심해진 요즘, 난 정확히 반쯤 죽어있어. 눈에 보이는 건 아니지만 난 믿은 것. 그게 날 이끌던 걸 느낀 적 있지 분명. 그 시작을 기억해. 나를 썩히던 모든 걸 비워내. 붙잡아야지. 잃어가던 것.


날이 밝기 전이었다.


우리는 칠흑 같은 어둠에서 눈을 뜨고 하루를 채근했다. 전날 싸 놓은 샌드위치는 챙겨야 하는 1호 아이템이었다. 열 시간 가까이해야 하는 산행에서, 체력은 곧 안전이었다. 그 외에도 중간중간 당분과 수분을 보충할 물과 프로틴 바, 초콜릿도 빼놓으면 안 되는 필수품이었다.


자고 일어나도 일기예보는 바뀌지 않았다. 전날보다 오히려 강수량이 더 많아졌다. 우리는 입고 온 등산복들의 방수기능을 한 번 더 체크했다. 어설프다 싶으면 우의를 챙겨야 했다.


평소에 셋이 여행할 때는 아침을 잘 먹지 않는다. 오히려 커피 한잔 하며 전날의 숙취를 덜어내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오늘은 긴장해야 한다.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에 위치한 설산을 오르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방심은 곧 사고로 이어진다. 한국에서 여기까지 사흘에 걸쳐 도착했다. 먼 나라에서 다치는 것은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이었다.


우리는 약간 긴장한 채로 오렌지주스와 계란프라이, 그리고 식빵을 토스트기에 구워서 잼을 발라 먹었다. 평소라면 한 조각만 먹고 치워버릴 퍽퍽한 식빵. 그러나 몸은 맛 따위는 오늘은 중요치 않다고 말하는 듯했다. 두 조각을 더 먹었다.




Verse 2 (0:30~)
지금까지의 긴 여행. 꽉 쥔 주먹에, 신념이 가진 것의 전부라 말한 시절엔, 겁먹고 낡아버린 모두를 비웃었지. 반대로 그들은 날 겁 줬지. 나 역시, 나중엔 그들같이 변할 거라고 어쩔 수 없이. 그러니 똑바로 쳐다보라던 현실. 그는 뛰고 싶어도 앉은자리가 더 편하대. 매번 그렇게, 나와 너한테 거짓말을 해.

검문소에서

푼타 아레나스는 작은 마을. 등산객들을 태워 나를 투어버스는, 예약자들이 묵는 숙소들을 돌아다니며 그들을 좌석에 실었다. 우리 숙소에도 버스가 도착했다. 버스에 올라타, 미리 앉아있는 사람들에게 간단한 인사를 건넸다. 다들 이른 새벽에 출발하는 등산이 피곤한 듯 눈을 감고 있었다.


맨 뒤에 있던 독일 여성은 책을 읽고 있었다. 독일어를 몰라, 책 제목이 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궁금했다. 무슨 책을 읽냐 물어보자, 그녀는 "철학"이라고 짧게 답해주었다.


해가 뜨지 않은 새벽임에도, 먹구름은 제 존재를 과시했다. 오늘의 등산이 저 녀석들 때문에 쉽지 않을 듯했다. 해가 산중턱에 걸리면, 따뜻해진 온도에 저 녀석들이 빗방울로 바뀌어 등산길을 미끄럽게 할 것이 분명했다. 나는 불안함에 신발끈을 다시 동여맸다.


금방 도착할 줄 알았던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은 꽤나 오래 걸리는 듯했다. 사실 얼마나 걸리는지 정확하게 물어보지 않았기에, 가까운 줄 알았던 것은 나만의 착각인 듯했다.


버스는 중간에 검문소 겸 휴게소 같은 장소에서 잠시 바퀴를 멈췄다. 가이드는 이곳이 아르헨티나와 땅을 맞대고 있는 검문소라고 알려주었다. 검문소에서 방향을 오른쪽으로 틀어 꺾어나가면 아르헨티나, 직진을 하면 우리의 목적지인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이었다. 갈림길에 위치한 휴게소에서는 간단한 샌드위치, 음료, 와인, 모자, 인형 등등 다양한 물품을 팔고 있었다. 우리는 먹을 것은 꼼꼼히 챙겨 왔으나 와인은 생각지 못했다.


"파타고니아 정상에 무사히 올라 설산을 바라보며 병나발을 불자!"

M이 아이디어를 내고, H가 박수를 쳤다. 나는 웃음으로 동의했다.


계산을 하고 휴게소 밖을 나오니 먼 곳에서부터 동이 트고 있었다. 햇살이 기세를 펼치는 자리에 먹구름들은 숨기 바빠 흩어졌다.


M은 마치 여행을 위해 태어난 인간 같았다. 모로코에서 썼던 두건만큼 칠레인들의 빵모자도 잘 어울렸다.




Verse 3-1 (0:54~)
그 담배 같은 위안 때문에 좀먹은 정신. 어른이 돼야 된단 말 뒤에 숨겨진 건 최면일 뿐, 절대 현명해지고 있는 게 아냐. 안주하는 것뿐, 줄에 묶여있는 개마냥. 배워가던 게 그런 것들 뿐이라서. 용기 내는 것만큼 두려운 게 남들 눈이라서. 그 꼴들이 지겨워서 그냥 꺼지라 했지. 내 믿음이 이끄는 곳, 그곳이 바로 내 집이며 내가 완성되는 곳.


국립공원에 도착했다.


날은 흐린 듯하나 비는 오지 않았다. 우리는 천만다행이라며 웃음을 지었다. 입 밖으로 꺼내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없었으나, 우리 셋은 오늘 하루가 평생을 이야기할 그 하루가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 어른이 된다는 것은 참 어려운 것이었다. 나는 저항했다. 부러졌다. 당시에 내 눈에는 너무도 불합리한 것들이 많았다. 그래서 사표를 내는 것이, 나에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지 않는 것이 남들의 눈이 두려워 굴복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럼에도 회사를 그만둔다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이번 산행에서 나는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했던 것에 대해 인정하고, 화해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을 목표로 걸었다. 벌어진 일은 벌어진 것이다. 이미 사표를 낸 것을 후회한들, 그 일은 일어난 일이다. 그 일에 대해 스스로 후회해 봐야 부정적인 감정만 차오를 뿐이었다. 자기 의심과 부정, 혐오와 오만 그런 감정들을 스스로 조율할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었다.




Verse 3-2 (1:19~)
기회란 것도 온다면 옆으로 치워놓은 꿈 때문에 텅 빈 껍데기뿐인 너 보단 나에게. 마음껏 비웃어도 돼. 날 걱정하는 듯 말하며 니 실패를 숨겨도 돼. 다치기 싫은 마음뿐인 넌 가만히만 있어, 그리고 그걸 상식이라 말하지. 비겁함이 약이 되는 세상이지만, 난 너 대신 흉터를 가진 모두에게 존경을. 이겨낸 이에게 축복을.


상식. 모두가 알만한, 동의할만한 보편적인 생각.


상식이 깨졌을 때, 그게 또 나의 일이 되었을 때. 나는 무너졌다. 상황이 상식보다 앞설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상황이 상식을 좌지우지했다. 상식이 무너지는 것을 그대로 수용하면, 나는 도대체 어떤 상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가? 내가 스스로 믿는 신념을 당당하게 주장하고, 지켜낼 수 없으면 그게 설령 직업이 될지라도 참아야 할 것인가? 혹은 그러한 생각조차 젊은 날의 치기일 뿐인가? (배경글 : 좌절이 닥쳐왔을 때)


내 혼란스러운 마음을 반영하듯 희뿌연 안개가 산등성이에 깔리기 시작했다. 금세 후드득하고 빗방울이 떨어졌다. H는 중간 사이즈의 패딩을 꼬깃꼬깃 접어 가방 안쪽에 푹 쑤셔 넣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얇은 방수재킷을 꺼냈다. 그는 한기에 몸을 떨었다. 그렇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땀이 나고 몸이 데워져 추위는 잊힐 것이 분명했다. 그 순간이 등산을 하고 있다고 자각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설산의 봉우리를 눈앞에 두기 위해.




Verse 4-1 (1:41~)
깊은 구멍에 빠진 적 있지 가족과 친구에겐 문제없이 사는 척. 뒤섞이던 자기혐오와 오만. 거울에서 조차 날 쳐다보는 눈이 싫었어. 열정의 고갈. 어떤 누구보다 내가 싫어하던 그 짓들. 그게 내 일이 된 후엔 죽어가는 느낌뿐. 다른 건 제대로 느끼지 못해. 뒤틀려버린 내 모습 봤지만 난 나를 죽이지 못해. 그저 어딘가 먼 데로. 가진 걸 다 갖다 버린대도 아깝지 않을 것 같던 그때는. 위로가 될만한 일들을 미친놈같이 뒤지고, 지치며 평화는 나와 관계없는 일이었고. 불안함 감추기 위해 목소리 높이며, 자존심에 대한 얘기를 화내며 지껄이고. 헤매었네 어지럽게. 누가 내 옆에 있는지도 모르던 때.


발걸음을 옮긴 지 얼마나 지났을까. 아마 한 시간은 넘은 것 같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우리가 모여서 출발한 등산안내소가 보이지 않았다.


돌아갈 곳이 보이지 않는다. 쉴 곳도 없다. 그저 나에게 주어진 길은 정상까지 올라간 후, 왔던 길을 되짚어 내려가는 것뿐이었다.


나는 항상 남들에게 멋진 사람이고 싶었다. 똑똑하고, 개성 있고, 능력 있는 사람. 그게 내가 원하던 내 모습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남들이 나를 보며 그렇게 평가해 주길 바랐다. 그렇기에 힘들어도 정확하게 표현하는 법을 몰랐다. 표현이 미숙하니, 단순히 사람들은 내 정신력이 나약하다 평가했다.


나는 그 평가를 부정할 만큼 강인하지 못했다. 뒤섞이던 자기혐오와 오만. 거울에서 조차 날 쳐다보는 눈이 싫었다. 나는 그렇게 남들의 수군거림에 침전하고 있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실 나는 나를 잘 몰랐다. 나를 제대로 알아야 힘들 때 스스로를 향한 믿음이 지탱해 줄 수 있는 것이었다. 무너지고 나서야, 내가 나를 잘 모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됐다. 열정의 고갈. 나는 당시에 그저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무슨 일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고, 아무 일도 없던 일이 되기를 바랐다. 내 손을 떠난 사표는 이미 내 의지와 상관없이 파장을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난 그 잡음에서 귀를 막고 싶었다.


그저 어딘가 먼 데로. 그 마음뿐이었다. 한국에서 가장 먼 땅으로 가서,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다 내려놓고 오고 싶었다. 그게 후회든, 결심이든. 나는 걸으며 나와 설전을 벌였다. 한쪽에서는 나를 응원했고, 한쪽에서는 나를 비난했다. 나는 그저 내 머릿속에서 양쪽이 원만히 화해하길 바랬다. 한국에서는 가족과 여자친구(지금의 아내)가 나를 걱정하고, 곁에서는 M과 H가 나를 딱 붙어서 지켜주고 있었지만 그 사실조차 잊어버린 채로 걸을 만큼 혼란스러웠다.




Verse 4-2 (2:27~)
그때도 난, 신을 믿지 않았지만 망가진 날 믿을 수도 없어 한참을 갈피 못 잡았지. 내 의식에 스며든 질기고 지독한 감기. 몇 시간을 자던지 개운치 못한 아침. 조바심과 압박감이 찌그러트려 놓은 젊음. 거품, 덫들, 기회 대신 오는 유혹들. 그 모든 것의 정면에서 다시 처음부터 붙잡아야지 잃어가던 것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부정하게 되는 순간은 참으로 괴롭다. 그 믿음을 회복하기 위해선 꽤나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 가만히 있으면 부정적인 감정은 심화된다. 오로지 움직이는 것 만이 회복의 단초가 된다. 발을 움직이던, 상황을 움직이던, 뭐든 뿌리치고 일어나야 달라진다.


그렇지만 회복의 과정은 아주 지난하다. 내심 마음 한 구석에서는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늘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내가 잘했다고 박수를 쳐주기라도 하면 나는 당장이라도 고민을 끝낼 생각도 있었다. 현실은 그렇지 않았지만 말이다. 결국 조바심에 내가 나를 무너뜨린 것만 같았다. 훨씬 더 현명하고, 지혜롭게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을 것처럼 남미로 떠났으나, 떠나는 순간부터 마음의 일부는 일터를 떠나지 못했다.




Hook (3:00~ 끝)
급히 따라가다 보면 어떤 게 나인지 잊어가 점점. 급히 따라가다 보면 어떤 게 나인지 잊어가 점점. 멈춰야겠으면 지금 멈춰 우린 중요한 것들을 너무 많이 놓쳐.


신중하지 못했다.

그것이 내가 산을 오르며 받아들여야 했던 과오였다.


급하게 일하고, 급하게 살다 보니 어떤 게 나다운 것인지 점점 잊어가고 있었다. 그걸 멈추기 위한 사표였으나, 더 좋은 해결책이 있었다는 점도 인정해야 했다. 멈춰야 했기에 멈췄으나, 중요한 것을 놓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그래도 괜찮다는 위로를 스스로에게 건네는 것이었다.


"무너질 수 있지만 또 일어나면 된다. 사고를 겪어도 회복하면 된다."


해는 공기를 데우고 먹구름이 머금던 비를 뿌리게 했다. 비를 다 짜낸 구름이 걷힌 자리에는 무지개가 걸렸다. 마치 자연이 회복의 지혜를 일러주는 듯 했다.


산중턱에 걸린 무지개가, 내 마음을 읽은 듯 “그래도 괜찮아”라며 화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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