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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블랙 Mar 16. 2024

습작1

1부 : 스무살

눈을 감았다. 눈을 떴다. 눈을 감았다. 눈을 떴다.


눈을 감았을 때 떠오르는 이미지는 눈을 떠서도 흐릿하게 잔상처럼 남아있었다. 그러나 실제 했다.

피복을 벗긴 전선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는 느낌이었다. 흡사 피부를 벗겨낸 후 피가 순환하는 혈관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 같기도 했다.


기현은 밤마다 잠에 쉽사리 들지 못했다. 초침이 째깍거리는 소리, 수전에서 물방이 한 방울씩 똑똑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소리가 선명해질 무렵이 되면 늘 잔상은 그를 찾아왔고 괴롭혔다.


요즘 들어 부쩍 잠에 들기 위해 노력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수능날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마음속에 부담감은 커져갔다. 정확히 D-100을 앞둔 시점부터 기현은 정해진 시간에 잠에 들려고 노력했고, 바로 그때부터 불면증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예민해져서 그래'


잠이 안 오는 밤이면 입버릇처럼 예민해져서 그렇다며 자책을 하는 날들이 되풀이되었다.



"너 요즘 야자 끝나고 과외해?"

매점에서 빵을 먹다가 아름이 걱정스러운 눈빛을 기현에게 보냈다. 아름은 기현의 짝꿍으로, 둘은 출출해지는 오후 세네시가 되면 어김없이 매점에 들러서 옥수수콘이 든 빵, 초콜릿 빵 따위를 사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아니 그냥 요즘 잠을 잘 못 자"

"왜? 무슨 일 있어?"

"모르겠어.. 그냥 수능날 컨디션 맞춘다고 백일 남았을 때부터 열한 시에 눕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잠이 잘 안 와."

"너무 스트레스받는 거 아니야? 그냥 하던대로 해"

"잠이 안 와서 스트레스야 수능보다도 하루종일 기운이 없어.. 근데 우리 형이 꼭 수능 100일 남았을 때부턴 수능날 패턴에 맞춰서 컨디션 관리 해야 된다고 했단 말이야"

"오히려 그러면 더 부담돼서 안 되겠다. 네 방식대로 하고 살아"


아름은 평소에는 별 시답지 않은 소리를 하다가도 가끔 정곡을 찌르는 듯한 말을 기현에게 건네곤 했다. '네 방식대로 살아라'. 기현은 내 방식이 도대체 뭘까 고민하면서 남은 빵을 입에 욱여넣었다.


특별할 것이 없는 삶이었다. 두 살 터울의 형은 늘 나에게 '형 같은' 존재였다. 운동도 형에게 배웠고, 공부도 형이 하는 모습을 보며 따라 했다. 그리 넉넉하지 않았지만 화목했다. 부모님은 기현이나 형이 하고 싶은 일이라면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들어주려 애썼다.


"남들 하는 만큼만 해. 남에게 피해 주지 말고 살아"


중간쯤만 가면 된다는 게 부모님의 신조였다. 기현도 그런 부모님의 말을 철석같이 믿으며 살았다. 아, 딱 한번 기현이 혼란스러운 적도 있었다.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기현이랑 잘 어울려 놀았던 반 친구 둘이 기현에게 졸업여행으로 제주도를 가자고 했다. 비행기를 타고 간다고 했다. 비행기를 한 번도 타본 적 없던 기현은 낯선 제주도보다도 비행기를 탄다는 생각에 달뜬 마음을 좀처럼 가라앉히기 어려웠다.


"엄마 나 친구들이 제주도 3박 4일로 가자는데 혹시 갔다 와도 돼요? 고등학교 들어가면 잘 못 본다고 겨울방학 때 가자는데.. 운전 못해도 여행할 만 하대요"

"그래..? 혹시 친구들이 여행경비는 얼마나 든다고 하더니?"

"비행기랑 숙박값 포함 한 50만 원 정도 든대요"

"그래..? 근데 기현아 엄마는 아직 기현이가 친구들이랑 멀리 여행 가는 건 좀 내키지가 않네.. 거기서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모르고. 엄마는 나중에 기현이가 성인 돼서 간다고 하면 보내줄 텐데 지금은 안 갔으면 좋겠구나"

"알았어요"


맥이 빠진 기현은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카톡으로 '난 이번에 못 갈듯'하고 보냈다. '혹시나 친구들이 내가 빠지면 안 간다고 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와 함께.

그러나 친구들은 '아 그래? 어쩔 수 없지'라고 건조하게 대답하고는 애초에 기현이와 갈 기대도 안 했던 것처럼 신나게 제주도에서 뭐 먹을지 어디를 갈지 떠들기 시작했다. 기현은 외로웠다.

그때 처음 기현은 부모님의 가르침에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진짜 걱정돼서 그런 건가? 혹시 50만 원이 부담스러워서 안된다는 거 아닐까? 우리가 조금 더 부자였으면 된다고 하지 않았을까?' 그때 한 번 기현은 중간만 가도 된다는 생각에 의문을 품어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고등학교를 진학하고 친구들과 멀어지고 서서히 제주도 사건과 부모님의 가르침에 대한 의문도 잊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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